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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빙글빙글 (2)

by 루달



" 어떻게 하나~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여울져 가는 저 세월 속에

좋아하는 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려워~"



1987년.

나미가 천천히 원(圓)을 그리던 순간이 아른 거린다.





친구는 비밀 얘기가 있다며,

부엌에 두꺼비 그려진 술 반 병을 갖고 오라 했다.

시아버지도 안 내놓는다는 그 귀한 반 병을 안고 갔다.


친구는 비밀을 말할 듯 말할 듯,

LP판만 만지작 거리며 괜히 나를 애태웠다.


그러다 갑자기 미끼 하나를 또 던지고

난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옆에 오징어도 한 마리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이 비밀의 문고리처럼 들려서

부엌으로 가 얼른 오징어를 구워왔다.


이미 친구 입가에선 군침이 돌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 내가 먼저 터뜨렸다.

“그럼 나부터 비밀 말한다. 나… 생리해.”

친구는 놀라지도 않고

" 나도.” 하며 담담히 받았다.


비밀 아닌 비밀들만 둥둥 떠 있는 공기 속에서

친구는 갑자기—

“한 잔 마셔 볼까?”


나는 비밀이 궁금해서 두꺼비 눈물을 한잔 확!

훅 넘어오는 고무장갑 안쪽 땀 응축 맛에

정신이 반쯤 탈출했다.


친구는 가수 김승진 LP판을 확 끌어안더니,

드디어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 박혜성 오빠 버렸어.”


“뭐? 어쨌다고?”


“내가 배신했다고! 김승진 오빠가 더 좋아졌어!”

국가 반역죄 고백하듯 말하더니

바로 눈물 터뜨렸다.


비련 여주인공 표정으로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불렀다.

“스잔… 찬 바람이 부는데…”


머리만 드라마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친구는 감정 회오리 속에 돌다가

침대 위로 픽 쓰러졌다.


“후 우우우…” 하고

전자파 튀는 소리를 내더니,

콧속에서는 진동벨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길을 잃었을 때 내는 소리였다.

그냥 기종 변경된 인간으로 진화한 느낌.


나는 성경말씀에 술취지 하지 말라고 해서,

정신줄을 겨우 붙들고 버텼다.

그러다 친구 옆에서 나도 기절하듯 잠들었다.



새벽 대참사는 그때 터졌다.

습기. 축축함.

이 집에서 한 번 싼 적 있는 나… 또 시원하게 싸버린 것이다.


창피해서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야… 나 오줌 쌌어.”

친구는 멍하니 “또?” 하더니,

아무 말 없이 옷까지 챙겨주었다.

부잣집 여유인지, 포용인지, 허당인지 알 수 없었다.


집에 나서는데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어제 말한 비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나도 바로 맞받았다.

“걱정 마. 너도 나 두 번 싼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도대체 누가 더 손해인지 모를 합의였다.


다음 날, 나는 교회 가서 회개했다.

앞으로 술 안 마시겠다고 다짐했지만…

앞으론 안 마시고, 옆으로는 마셨다.



징검다리 연휴가 끝난 월요일,

경아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모님 귀국하시더니

집 술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난리가 났단다.


소주 반 병, 맥주 한 병까지 없어진 걸

바로 눈치챘다고 했다.


그때 언니가 친구들과 마셨다고 울면서 자백했고,

그 와중에 머리까지 잘렸다고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다녀간 다음날

언니는 친구들을 불러 양주를 마셨다고 했다.


그리고 양주병에 물을 채워놓고 먼저 잠든 사이,

친구들이 소주와 맥주까지 깡으로 마신 줄 알고

언니 혼자서 뒤집어쓴 상황이었다.



그 얘길 듣고 양심이 찔린 나는

다음 날 언니한테 바로 찾아갔다.


근데 언니 머리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머리 한쪽은 간밤에 전역했고,

다른 쪽은 아직 훈련소 귀가 중인 듯 멈춰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솔직히 말했다.

“언니… 저 사실 그 술 제가 마셨어요.”


언니는 이미 해탈한 얼굴로 허탈하게 웃으며


"괜찮아 우리가 마신 양주는 안 걸렸으니까 됐어"


그 말을 듣고도,

언니 머리만 보면 자꾸 상상이 됐다.


내가 마신 소주반 병, 맥주 한 병, 오줌까지 걸렸다면...

내 머리는?

상상해만 해도 아찔했다.



언니도 웃고 분위기가 풀리자

나는 그 김에,

그날 침대에 또 오줌까지 쌌다고 털어놨다.


언니는 여유 있게 웃더니,

바닥을 툭툭 쳤다.

“다음엔 꼭 바닥에서 자라.”


그 말 듣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그날 경아네서 입고 잤던 파자마 바지.
엄마가 왜 안 가져오냐고 했던 바지.

그래서 경아한테 물었다.
“나 그날 오줌 싼 바지… 다 말랐냐?”

경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나 이모네서 잤는데?”

그때 경아 언니가 끼어들었다.


“그 파란 걸레 니 거였냐?
그날 친구가 오바이트해서
세탁기 위에 니 바지로 다 닦고 봉지에 버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영혼이 조용히 천국행을 탔다.
아… 벌 받았다.

집에 가서 결국 엄마한테 결과만 말씀드렸다.
술 먹은 얘긴 빼고,
그날 바지에 그냥 똥 싸서 버렸다고.

엄마한테 눈물 쏙 빼게 혼났지만
머리 안 잘린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나도 친구 언니처럼,
해탈이 찾아왔던

그날이었다.



작은 일 하나가 튀면 엉뚱한 데서 파도가 친다.
시간도, 사건도, 감정도 서로 뒤얽혀 굴러간다.
결국… 빙글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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