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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빙글빙글 (1)

by 루달


여울져 가는 저 세월 속에

좋아하는 우리 사이

어질까 두려워~

1987년,

나미가 천천히 원(圓)을 그리던 순간이 아른거렸다.

결국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다시 빙글빙글 이었다.





다음날은 개교기념일.

학교도 쉬고, 징검다리 연휴였다.


친구가 나를 턱 치며 다가오더니,

“우리 부모님 일본에 가서 나랑 언니 둘 뿐이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자!”

그 말만 듣고도 가슴이 벌써 반은 나가 있었다.


집에 와서는 엄마한테 외박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엄마는 모든 고민을 면발로 밀어내는 사람 같았고,

오빠는 라면은 거들뿐, 자기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동생은 젓가락질이 안 돼서 면발 한 가닥만 잡아도

가업을 일으킬 표정이었다.


나는 그 옆에서

온갖 용기를 긁어모아 말했다.


“엄마… 오늘 경아네서 자고 올게.”

엄마는 TV에서 시선도 안 떼고,
손가락만 앞으로

툭—

두부 모서리 치듯 까딱했다.


“가.”



그 한 글자가
내 외박 허가증.

라면 냄새까지 내 편이었다.


나는 바로 가방을 열고

글씨 쓰면 나오지도 않는 펜,

어디서 주워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 머리끈까지,
쓸데없이 쓸어 담았다.

마치 해외 망명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속으로 외쳤다.


“렛츠고… 나의 자유다!”


그리고 가족들의 라면 씹는 소리를 가르며

그림자처럼 빠져나갔다.



집에서 3분, 친구네에 도착했다.

앉자마자 조잘조잘 입이 먼저 달렸다.


체육선생은 왜 매일 기분이 나쁜지,

내 엽서가 왜 그렇게 예쁜지 …

그렇게 인생의 도움 안 되는 것들로 밤을 채웠다.

친구는 갑자기 거실 진열장으로 가더니,

샴페인을 꺼냈다.


호기심에 눈동자까지 방황하는 순간이었다.

내 생애 첫 알코올.

성찬식 때 마신 애매한 포도주스 빼면

거의 첫 경험이었다.


친구는 병을 휘리릭 돌리더니 ‘톡!’ 하고 땄다.

분홍색 기포가 부루루 올라오는데,

미니 분수대 같아서 탄성이 "와~!" 절로 나왔다.

거품은 동네 올림픽 성화처럼 활활 올라왔다.



우리는 밥그릇에 쪼르르 따라 마셨다.

친구가 선창으로

“브라보!!”

“콘!!”

쨘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둘은 밥그릇을 들고도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척을 했다.


맛은…

오란씨에다가 식초 몇 방울 얹고,

미원 한 숟가락이 목구멍에 폭죽처럼 퍼지는 느낌.

이런 걸 왜 먹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였다.



두 번째 잔에서부터

딸기요정이 마법가루를 뿌리는 듯했다.

그 수상한 분홍 액체는, 입안에서 난리가 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합의를 봤다.

“한 잔 더 먹어보자!”

우린 한 잔, 두 잔…석 잔을 비우고 또 채웠다.


친구 얼굴을 보니까 목까지 벌게져 있었고,

발음은 자음 모음이, 따로 놀았다.

둘은 얼굴만 봐도 깔깔대며 바닥에 퍼져갔다. 배도...


그러다 친구가 눈빛 나사를 바짝 조이더니,

갑자기 물었다.


“너… 내가 좋아? 재은이가 더 좋아?”


이건 거의 우정의 중간고사였다.

순간 주여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평화를 가장한 생존형 잔머리가 돌아갔다.

나는 침부터 삼키고, 호흡은 갈 길을 잃은 채,

“둘 다 조…

아니, 네가 더 좋지.”


친구의 얼굴에 별빛이 쏟아진 듯했다.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더니,

콧노래까지 부르며 쟁반을 들고 왔다.

콩나물국, 그리고 병맥주 한 병.



샴페인 다음에 콩나물과 맥주라니…

거의 실험실 조합이었다.

신세계 업데이트였다.


친구는 OB 쓰여있는 병을

병따개로 뿅! 하고 따면서 말했다.


“이건 진짜 어른들이 먹는 술 이래.”


둘이서 소주잔에다 조금씩 들이켰다.

그 맛은… 번개 맞은 나무가 우는 맛이었다.

이건 인생으로 견디는 맛이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카~’를 외치는구나 싶었다.



나는 일단 살려고

빨간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다.

근데 그게 또 은근히 잘 맞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 조합이 ‘어른들 세계’의 맛이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둘이서 맥주 한 병을 싹 비웠다.

한 명은 허밍인지 괴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한 명은 머리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우린 이미 정체불명 종족이 돼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내 손목을 살포시 잡더니 말했다.

“나… 비밀 얘기 있어.”

나는 그 말 듣자마자 친구 옆으로 바싹 기어갔다.
궁둥이에 감자 만한 몽고점?

혹시 새엄마였는데 외계인?

머릿속엔 온갖 시나리오가 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미 친구 말에 말려들고 있었다.


“저기… 주방 창문 앞에 반 병 더 있어…”

"반 병?"

"두꺼비 그려진 거. 그거 들고 오면 돼.”


나는 미끼 삼킨 잉어처럼 벌떡 일어나,

맥주병이랑 냄비를 치우러 갔다.



“알았어 내가 얼른 가져올게!!”


부엌으로 총총 뛰어가서

시 아버지도 절대 안 내놓는다던

그 귀한 두꺼비 반 병을 들고 왔다.





딸꾹.

빙글빙글(2) 내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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