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어부바~아이고 내 새끼"
1987년, 골목마다
포대기 속 아이들은 단풍잎처럼 흔들렸다.
그 따뜻한 무게가 마음을 묶는 방식이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비가 많이 내려서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 벗 삼아
작은 로마의 휴일을 보내려 했다.
빗소리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끌어올리고.
난 피아노 뚜껑과 악보를 '촥'열었다.
아름다운 숨을 내 쉬고, 딱 한 마디를 쳤다.
엄마가 부엌에서 달려오시며
"쉿! 치지 마! 오빠 공부 하잖아!"
바로 내 악보를 덮으셨다.
오빠는 성적이 급 상승해서,
집안에서 그야말로 대왕 마마가 돼버렸다.
난 마루 바닥에 '덥석'온몸으로 투정했다.
예상했던 나만의 휴일은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렸다.
화장실에 숨어 휴식을 구걸하던 찰나에도,
엄마는 노크 따위 없이 문을 확 열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집이라도, 화장실 문은 잠가야 산다는 걸.
그리고선 엄마는 실내화를 ‘슝’ 내 던졌다.
양치질 말고는 처음으로 뭔가를 닦아보라는 뜻이었다.
이상하게 자꾸 문질문질해도
거품만 나오고 회색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조차 답답했다.
이를 본 엄마는
"하이타이를 때려 부었네! 나가!"
두 번씩 손이 가는 아이라시며 다시 헹구셨다.
습하고 축축한 날씨 탓에
마루에 잠시 눕고 싶었지만,
엄마는 내 앞에 신문지와 손톱 깎기를 휙 주시며
"드러 주거 써! 오빠는 깔끔 떠는데 넌 왜 그러니!"
내가 봐도 손톱 줄은 까만색.
그래도 비교당하는 게 안 좋아서 근육들이 반응했다.
손톱을 하나씩, 바싹바싹 잘라 버렸다.
엄마는 CCTV 보듯 나타나서,
" 발톱도 깎아! 공룡이니!"
곧바로 발톱이었다.
고개를 숙이는 동안
목덜미에는 뻐근함이 몰려왔고,
배가 눌려 발을 올릴 수 없는 고통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제야 잠시 쉬려는 순간,
육쪽마늘과 빨간 바구니를
내 앞에 놓고선 까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시집가서 사랑받는다며,
현실감 없는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옛날 같았으면 네 나이 때 시집가서 애도 낳고..."
열네 살에게 시집을 논하는 것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 모든 고된 일을 마치자,
어머니는 감자 수제비를 끓여주셨다.
창문 밖에 내리는 비는
목련과 라일락 사이로 비벼댔다.
그 마찰을 바라보며 먹는 수제비는
잠시나마 수고한 일당을 잊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어머니는 귀이개를 들고선,
날 잡아끌어다 무릎에 눕혔다.
보이지 않는 귀이개의 끝이
뇌 어딘가로 닿을 듯했다.
불안한 감각을 시뮬레이션하다가
어느새 간질간질 손길이 익숙해가고...
점점 멀어져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알고 계신
단 하나의 자장가.
낯익은 음성이 스며들며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자장가는 불러 주지 않았다.
최초의 자리 잡은 귀 딱지
자장자장...
지금도
귀를 만지작거린다 한들
엄마 거는
나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