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인생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자란다

아이의 가슴에 지도를 그리다

by 어디가꼬

프롤로그

아이의 인생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자란다

제복을 벗고, 아들의 손을 잡고 나는 세상이라는 교실로 나섰다.

지난 8년간 나의 일터는 학교였다. ‘스쿨폴리스 팀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수없이 많은 교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아니었다. 성적이라는 숫자에 짓눌린 어깨, 존중받지 못한 결핍이 낳은 날 선 공격성, 그리고 타인과 공존하는 법을 잊은 채 외로운 섬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뒷모습이었다. 그 현장에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정해진 답안지를 빠르게 채우는 요령이 아이의 인생을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내 아이만큼은 점수가 적힌 종이 대신,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스스로 노를 저어 나아갈 수 있도록, ‘왜 살아야 하는지’라는 동기라는 나침반을 쥐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먼저 던진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식품 알레르기를 안고 태어났다. 남들에겐 평범한 우유 한 잔, 빵 한 조각이 우리 아이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될 수 있었다. 여행은커녕 외출 한 번에도 비상약과 도시락을 전투식량처럼 챙겨야 했다. 세상을 보여주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했다. 그랬던 우리 부자가 이제는 유모차를 접고, 음식 가방을 내려놓고 대륙을 건넌다.


완벽한 계획도, 넉넉한 여유도 없었다. 알레르기라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유모차 하나에 의지한 불안한 첫걸음뿐이었다. 아이의 알레르기를 함께 견디며 배운 것은 ‘인내’였고, 그 끝에 마주한 여행에서 배운 것은 ‘환대’였다. 세상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고, 도움의 손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 방콕의 어느 아침, 아이의 허벅지에 응급 주사기를 꽂아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 승강장에서, 문이 닫히는 사이 홀로 떠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발이 떨어지지 않던 날도 있었다. 그 아찔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완벽하게 설계된 안전한 경로가 아니라, 어떤 경로 이탈 앞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것을. 여행은 더 멀리 가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멈춰 서는 용기였다.

산책을 나서면 아이는 작은 벌레 하나, 이름 모를 들꽃 하나 앞에서도 한참을 머문다. 나는 그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멈춤 속에서 아이의 세계는 더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순간,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태울 만큼 몰입해 본 아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호주의 광활한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100년 된 증기기관차의 연기를 마시며 나는 다시 확신했다.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공부는 책상 위에 있지 않았다. 낯선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속에, 펭귄 아빠의 뒷모습에서 배우는 책임감 속에, 그리고 자신을 환영해 주는 세상을 향해 마음껏 추는 춤사위 속에 있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항구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에서 아이는 분명 수많은 장애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아이가 참고할 지도는 설명서도, 정답지도 아니다. 바로 그 순간 곁에 있던 부모의 뒷모습이다. 낯선 환경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힘, 그것이 내가 여행을 통해 아이에게 건네고 싶었던 전부였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그리고 육아 비법서도 아니다. 학교폭력의 현장에서 발견한 우리 교육의 빈틈을 ‘여행’이라는 경험으로 어떻게 채워갔는지에 대한 기록이며, 아빠와 아들이 함께 걸으며 써 내려간 치유의 여정이다. “아이에게 부모가 전부인 시간은 딱 10년.” 그 짧고도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한 아빠의 선택이, 지금 이 책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아이의 손을 잡고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부모에게,
작지만 믿을 수 있는 지도 한 장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제복을 벗어두고, 아들의 손을 잡고 진짜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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