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아이를 안고 지우펀의 끝없는 계단을 올랐다

빛물 섞인 눈물로 쓴 '아빠'라는 이름

by 어디가꼬

빗물 섞인 눈물로 쓴 ‘아빠’라는 이름


보라카이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몇 가지 철칙이 생겼다. 비행시간은 길지 않을 것.
대중교통은 편리할 것. 날씨는 온화할 것. 그렇게 선택한 세 번째 여행지는 **타이베이**였다.


타이베이는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도시다.

508m 높이의 타이베이 101이 하늘을 찌르고, 밤이 되면 스린 야시장에서 수많은 불빛과 음식 냄새가 사람을 붙잡는다. 장제스 기념관, 룽산사 같은 역사 유적도 도심 가까이에 있고 MRT는 정확하고 편리하다. 치안도 비교적 안정적이며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마카오에 이어, 미리 배워 두었던 중국어 몇 마디는 낯선 땅을 이웃 동네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변화는 도시가 아니라 아이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동안 지독하던 알레르기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호텔 조식 뷔페에서는 채소나 과일, 고기 종류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고 스핀에서 유명한 ‘닭 날개 볶음밥’을 아이와 나눠 먹었다. 먹거리로 유명한 야시장 한복판에서 아이의 입이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그 어떤 관광지보다 크게 감동했다.

여전히 한 손엔 유모차, 어깨엔 도시락 가방이 들려 있었지만, 아이의 식탁이 넓어지는 모습에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지우펀의 젖은 계단에서


타이베이에서 차로 한 시간. 우리는 산골 마을인 **지우펀**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붉은 등불이 걸려 있고, 계단식 거리 양옆으로 찻집과 상점들이 이어져 있는 곳, 과거 금광으로 번성했던 마을로, 지금은 전통찻집과 길거리 음식, 그리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해 질 무렵 등불이 켜질 때 가장 아름다운 이곳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다.


붉은 등불이 늘어선 계단식 마을. 비는 아열대 특유의 고집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 위로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취두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 아이가 잠투정을 시작했다. 잠시 후, 아이는 내 품에서 깊이 잠들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기띠를 졸업한 아이. 유모차는 계단 앞에서 무용지물.

나는 잠든 아이를 두 팔로 안고 미끄러운 돌계단을 한 칸씩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팔이 절여 왔다. 허리에 통증이 올라왔다. 물과 땀이 뒤섞여 눈을 가렸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 자식이 아니었다면, 이 고통을 견뎠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아빠였다.
그리고 아빠는 여기서 멈출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력을 다해 계단을 올랐다.
꼭대기에 도착해 한 손으로 아이를 받친 채 남은 한 손으로 버블티를 겨우 들이켰다.

그 달콤함은 지금도 우리 부부가 웃으며 꺼내는 무용담이 되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비슷한 맛이 비슷한 버블티를 팔았지만, 그날 지우펀에서 마신 그 한 모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사랑의 무게를 견디는 법


그날 사진 속 나는 빗물에 젖어 엉망이었지만 표정만큼은 단단했다. 나는 학교폭력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를 보았다. 방황하는 아이들 곁에는 잠시라도 기대어 쉴 어깨가 없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사교육이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칠 때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품이었다. 지우펀의 계단에서 내가 견뎌낸 것은 아이의 몸무게만이 아니었다.

한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사랑의 무게였다.

부모가 먼저 비를 맞을 때 아이는 말없이 배운다. 세상은 거칠고 비는 언제든 내릴 수 있지만 나를 지켜주는 품이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 그 신뢰는 훗날 아이가 더 큰 파도를 만났을 때 스스로를 붙잡아 줄 힘이 된다. 아름다운 단수이의 노을보다 지우펀의 젖은 계단이 나를 진짜 아빠로 만들었다.

그날 나는 배웠다. 책임이란 아이를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기꺼이 먼저 젖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모에게 남기는 한마디

부모란 아이 대신 비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먼저 젖어줄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 어깨 위에서 아이는 세상을 믿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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