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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가꼬 Dec 22. 2022

서울에 대한 착각

내가 기억하는 서울 이란 곳은


해병대 입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니 군대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얼른 해치워 버려야 하는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병무청을 찾았다.

    나    :  지금 바로 지원할 수 있는 군대는 어디예요?

 병무청 :  '정보사'는 지원은 가능하지만, 가 비밀이라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요.

              '특전사'는 지원 가능하고, 직업군인이라 복무기간이 4년 6개월입니다

              '해병대'도 지원 가능하고 복무기간은 2년 4개월입니다"

    나     :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군대가 어디예요?

 병무청  :  해병대요, 다음 주에 바로 입대가 가능합니다

나는 그렇게 평범한 군 생활보다는 힘들게 군 생활하면서, 좀 더 큰 보람과 의미를 찾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지금도 힘든 군대생활은 사회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간혹 직장생활이 힘들 때마다 내가 힘들다는 해병대 군생활도 했는데 이거 못하겠어라는 마음을 먹고 나면 못할 것이 없다.


말년휴가

일찍 입대한 탓에 말년에 휴가를 나오니 다들 군대 가고 같이 놀아줄 친구가 아무도 없다

말년 휴가라 가족들도 크게 반기질 않고, 함께 보낼 여자친구도 없다. 휴가 가서 뭐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같이 휴가를 나온 부대 후배가 말을 건넨다, 서울의 잠실이 집인데 휴가 때  별 계획이 없으면 같이 가서 놀자고 한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선후배 간의 군기가 대한민국 어느 군대보다 쌔다는 해병대라서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생각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러 차례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성화에이긴 척 서울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생각하고 함께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와 후배 그리고 또 한 명의 후배, 이렇게 총 3명이 함께 서울로 휴가를 떠났다.


해병대의 휴가복장은 요란하기로 유명하다. '해병대는 짜새(멋)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소대 지정된 이롱(다리미) 만든 미리 휴가자들의 복장을 준비해 준다.

군복의 주룸에 손이 베일 정도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군복과 각 잡힌 팔각모는 물론이고

비장의 무기로 사회에 어느 곳에서도 절대로 꿀리지 말라며 준비해주는 링이 있었다.

워커 위 발목에 차는 림안에는 동전이나 탄피 같은 것을 구겨 넣어서 소리를 극대화시킨다.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나는 소리는 위화감까지 조성하기도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마도 후배는 해병대 군복을 여러 명이 같이 입고 각자 워커에 링을 차고 서울시내를 걷고 싶은 로망이 있었던 것 모양이다.


서울,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부잣집 저택과 높은 빌딩, 한강의 유람선과, 63 빌딩이 전부였다. 당시 후배들은 나를 데리고 서울에서 제일 물이 좋다는 천호동의 한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서울의 나이트클럽은 지금까지 보던 지방의 클럽과는 규모나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우선 테이블 위에 있는 조명등을 머리 위로 들면 종업원들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다. 담배 불도 붙여준다. 후배들은 종업원들에게 팁이라며 돈을 건넨다. 잠


잠시 후 신나는 댄스타임이 끝나고 잔잔한 음악의 블루스 타임이 시작되자 처음 보는 진풍경에 나는 마냥 신기했다.

후배들이 아까 얼마를 찔러 줬는지 여자들이 웨이터의 손에 이끌려 끊임없이 우리 테이블로 온다. 하지만 군복 입은 군바리를 좋아할 여자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호기심에 왔다가 말 몇 마디 건네고는 곧장 사라진다. 그렇게 몇 군데의 나이트클럽을 더 옮긴 후 술에 취해 후배의 집으로 향했다. 후배는 익숙한 듯 휴가 중에 쓰라고 부모님이 주신 신용카드를 마구 긁었다.

술 취해 처음 보는 군대 후배 집을 가는 것이 불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따라갔다


아침에 눈을 뜨니 후배 어머니가 밥 먹으러 나오라며 우리를 깨운다, 새벽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에 속도 쓰렸지만 할 수 없이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세상에 어머님이 식탁에 차린 아침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녁상 같은 아침상이었다

30첩도 넘는 반찬과 산해진미, 상다리가 부러지겠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다.


정신없이 먹고 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후배 집은 서울에서도 엄청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휴가 나온 아들에게 마음껏 놀고 오라며 내어준 신용카드와 끝이 없을 것처럼 밤새 빛나는 번화가의 네온사인, 가는 데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 술 마시고 새벽에 온 아들을 위한 저녁 같은 아침밥상을 차려준 어머니, 이게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이란 곳이었다.


다시 찾은 서울

절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시간이 모두 가고 드디어 제대를 하게 되었다

한 달 먼저 제대한 선배가 서울에 꼭 한번 놀러 오란다

갓 제대해서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서울후배와 함께 보낸 휴가가 생각났다.

무작정 또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서울의 목동이라는 동네 이름뿐이다. 함께 고생한 선배와 군대가 아닌 사회에서 군복을 벗고 테이블에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추억을 되새기니 금세 새벽이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선배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나는 또 별생각 없이 선배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여름 어느 날 더위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방한칸을 혼자 차지하고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목이 말라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보니 내가 혼자 잠든 방보다 조금 더 작은 방에서 선배와 어머니, 어린 동생 2명 이렇게 총 4명이 선풍기 한대에 의지하며 엉켜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혼자 자도 더위에 깰 정도니 얼마나 덥고 불편했을까란 생각에 술이 확 깬다

누가 깨기라도 할까 겁이 나서 조용히 까치발을 하고 집밖으로 나왔다

그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뛰었다.

잠시 후 누가 나를 막 부르면서 뒤쫓아온다. 선배의 어린 동생이다.

"아저씨, 오빠가 아침 드시고 가시래요"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고 따라왔던 모양이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도저히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정중히 사양하고 얼마 안 되지만 동생 손에 용돈을 쥐어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이란 곳

그동안 얼마 안 된 인생을 살면서 서울에는 모두 잘 사는 사람만 있다고 생각한

나의 착각이었다. 그 당시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배가 베풀어준 따뜻한 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제대하고 자신을 찾아준 후배에게 모든 걸 다 내준듯한 최고의 대접이었다


그날 이후 서울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깨졌다

지금도 서울 하면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한 곳, 잘 사는 사람은 너무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너무 못 사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이란 곳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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