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까먹는 진리.
‘미안한데, 그래서 이번에는 못 볼 것 같아 담에 보자.’
미안함을 잔뜩 담은 카톡메세지가 왔다. 추석때 간만에 내려가서 서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았다. 이 친구네도 우리도 연휴 대부분을 꽉 채워서 친척들과 복닥복닥하는 집이다. 게다가 둘 다 과제도 나왔고 그 친구네 집은 또 여러 사정이 겹쳤다. 못 보는게 당연하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못 보는게 당연한 이 타이밍에 대한 서운함. 그러고보니, 예전에 이 친구에게 우리는 헤어질 때 인사를 너무 대충 한다고 투덜거린적이 있다. 언제 다시 본다고. 고향에 남아있고, 집에 가족이 있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있는 그 친구와 낯선 서울에서 집에 아무도 없고 학교에서는 인사한번 주고받을 사람이 없는 나. 언제든 마지막일 수 있는데….그러니까 만남에 대해 내가 훨씬 더 많은 무게와 의미가 실감이 날 수밖에 없다. 그 친구도 나를 못 봐서 아쉽겠지만, 새삼스럽게 내 쪽이 훨씬 더 아쉬운 쪽이라는 사실이 성큼 다가왔다. 그래서 번뜩,
앙버터 빵을 사가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용돈 받는 대학생이 투덜거릴 문제는 아니지만,이번달은 유독 여러 사정으로 돈이 많이 나갔다. 항상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갈때는 빵을 사갔다. 보통 우리가족이 사는 본가 근처에서는 잘 없는 빵들을 골랐다. 그렇지만 이번달은 돈이 없어서 안 사가려고 했다. 이번만 내려가겠어? 다음에 내려갈 때 비싼 빵을 사가면 되지.
아니다. 그 친구의 메시지를 보고, 만남에 무게를 느끼는 쪽은 행동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마지막일 수 있고, 마지막이 아니라도 언제일지 기약할 수가 없다. 항상 옆에 사람이 없는 나에게는 멀리 떨어져있는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앙버터빵을 샀다. 이걸 유독 좋아해서 서울을 올라올 때마다 몇 개씩 사 가는 H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집 사람들은 앙버터빵을 안 먹어봤고, 좋아할 것 같았다. 돈이 없으면 뭐, 통장에 있는 것을 땡겨쓰거나 하면 된다. 앙버터빵은 예상외로 가족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H줄 것을 하나 빼 놓으려고 했는데 늦었다. (보고있나 H. 난 최선을 다했다. 다음에 네가 와서 사가라.)
사가길 잘 했다. 반응이 좋다. 전부 합해서 10300원이었다. 10300원을 주고 언젠가 할 후회를 조금 사서 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왔다. 할아버지는 누워계셨다. 예전에 할아버지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계셨다. 할아버지 자전거를 내가 타고 가버려서 자주 혼났다. 우리가 갈 때 올 때, 항상 어디선가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곤 덤덤한 얼굴로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그때는 그 모습이 다시 볼 수 없는 과거가 될 줄 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우리가 대화가 없는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만 지금 할아버지는 자전거 대신 지팡이를 짚고 계신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쉽게 과거가 되어버려서 겁이 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또 보면 되지, 다음에 보자.” 이 말이 시간이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을 바로 옆의 사람을 다 잃고 나서야 알았다. 상대방은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나는 최선을 다 해야겠다. 순식간에 없어져버린 앙버터빵을 보면서 좀 더 사올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어떻게든 후회는 남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