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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Dec 27. 2018

헤엄치지 않고 부유하기.

둥둥 떠다니기. 나에겐 낯선 방식.

지금까지 너무 미래와 과거에만 큰 의미를 둔 것 같아서, 현재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적으니 뭔가 쓸데없이 장황한데,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머릿속에 저런 문장이 정리되어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너무 괴로우니까. 과거에도 괴로웠고 지금도 괴롭고 미래를 생각해도 괴로우니까. 눈 앞의 일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미래에 뭔가 엄청난 것을 바라고, 그것만을 바라보면서 버티는 것이 아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서 조그마한 행복을 느끼면서 삶을 누려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삶을 ‘버텨왔다’.

만약 지금이 4월 초이면, 5월 5일 어린이날에 가족이랑 혹은 친구랑 어딜 놀러 갈 즐거울 예정이 잡혔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그 예정에서 디데이를 세면서 그 날이 올 때까지 꾹 참고 삶을 버텨왔다. 초등학생이 뭘 알고 그랬겠냐만은, 어쨌든 그렇게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 그 기다렸던 날이 끝나는 밤에 침대에 누워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아~ 오늘 기대한 대로 즐거웠다~ 다음에도 저렇게 놀았으면~”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되지 않아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눈을 꿈뻑거렸다.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그것이 허무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기대하던 것이 지나갔어. 난 이제 뭘 기대하면서 살지? 이 눈 앞의 시간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버티지? 하는 허무감과 불안함이었다.

이 방식을 버리기로 했다. 이젠 어렸을 때처럼 그렇게까지 기대할만한 예정은 잡히지 않았고.(아니면 내가 커가면서 모든 것에 심드렁해졌을 수도 있다.) 많은 기대를 해도 막상 닥치면 별 것이 아니거나 재미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또다시 많은 실망과 허무함으로 허덕이곤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미래의 특정한 한 날을 기대하면서 삶을 버티는 이 방식은 너무나도 많은 체력과 에너지를 요구했다. 후폭풍도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만 한다.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 이 방식 또한 누군가의 방식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물론 살아가는 방식을 앞으로 이렇게 할 거다! 하고 정하면서 그 방식만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신호등을 기다리는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흔히 말하는 그 하루를 잘 살아왔다~하는, 퇴근 후 맥주 한 캔이나, 징그러운 공부 사이의 휴식 중에 보는 최애의 사진이나 동영상 등, 그 순간의 일상의 힘이 없었다는 것을!


항상 괴로운 이 상황을 버티면 종강을 하고, 집에 가고, 친구가 놀러 오거나 놀러 가고,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이 순간만 버티자!  그렇게 이 거지 같은 나날들을 인내하면서 살아오다 보니까, 그 나날들에 만족을 하거나 느긋하게 살아가는 지금 이 평온함이 나에겐 너무 낯설다. 


어쩌면 괴로움에 중독되어 있었나 보다. 

내 삶의 원동력은 미래의 기대할만한 하루 이틀이 아니라, 괴로움이었다. 발버둥이었다. 애쓰면서 괴로워하고 발버둥 치면서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려고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연히 몸에 힘을 뺐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에 둥둥 떠다녔다. 그제야 물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는 걸 알았고, 그 하늘을 보게 되었다. 하늘은 내 맘에 들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많았고, 내가 아무리 애써도 물결의 흐름이 바뀌면 뒤로 갈 수도 있고, 그냥 둥둥 떠다녀도 앞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어딘가에 걸려서 남들 다 앞뒤로 흘러가는데 혼자 한 곳에서 구경만 할 수도 있다. 애쓰고 마음고생을 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노력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해도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고, 발버둥 쳐도 뒤로 갈 수도 있고, 앞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뒤였을 수도 있고, 내 목적지는 뒤에 있을 수도 있고. 하여간 경우의 수는 무진장 많았다. 그렇게 많았는데 나는 애써서 노력해서 하나의 목적지만 보고 욕을 하면서 겨우겨우 도착해놓고는, 막상 도착하니까 그것마저도 흘러가버려서 어리둥절하고만 있었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없겠지! 있으면 어쩔 수 없고.(남일이다 정말.)

지금 이 상황은 나에게 낯설다. 지금 괴로워야 하는데, 괴롭고 당장 벗어나고 싶어서 무언가를 선택했는데. 그 괴로움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힘이었는데. 딱히 그런 것이 없으니까 미래의 결정도 미루게만 된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서다. 친구는 이런 나를 보며 “인생 노잼 시기구나!”하고 진단 내렸다. 너무 눈 앞의 일만 보는 것도 부작용이 있나 보다. 

적당한 기대와 적당한 만족과 적당한 그리움. 나는 항상 너무 많은 기대만! 너무 많은 그리움만! 그리고 지금은 너무 많은 만족만! 하고 있다. 그래도, 그리움과 기대만으로 구성된 삶에서 만족을 알게 되었으니까, 큰 발전이 아닌가! 뭐 어떤가, 정답은 없는데. 내가 힘들면 오답이다. 나쁘지 않으면 정답이다. (아주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오늘도 빈둥거리면서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서 애써도 막상 그 현실이 닥치면 계산대로 안 되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많이 지쳐있으면 흐르는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렇게 체력과 에너지가 충분히 쌓이면, 다시 사는 대로 흐름을 바꾸도록 노력해보자. 그건 또 그때의 내가 하겠지. 빈둥빈둥.



그러고 보니 종강을 하자마자 개강을 해서(계절학기) 늘 염원하던 그림 그리기를 못 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감기까지! 올해가 가기 전에 과연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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