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조끼 둘, 그대의 보호자가 그대를 공격할 때.
‘가족’이란 관계에 거대한 의미나 의의는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이 만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는 평생 만날 일도 없을 관계다. 그렇기에 소중한 관계다. 그렇기에 특별하다고? 그렇기에 가족에게 잘하라고? 내가 할 이야기는,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남을 ‘당한’ 억울한 ‘자식’들의 이야기이다.
가정폭력, 학대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구구절절하게 내 이야기를 해도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그 정도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정도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거. 가정폭력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을 때, 저녁 7시의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상담센터의 모든 상담원들이 통화 중이라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느낀 무력함이란.
사실, 예전부터 나에게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힘은 없었다. 그래서 딱히 안 무서웠다. 그가 가진건 경제력과 남자로서 여자보다 센 물리적 힘. 그것들을 무서워했지. 내가 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서 자기 자식을 저런 힘으로 이기려는 아버지가 참 우습다.
어머니는 우릴 위했다. 그게 어머니의 최선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어머니도 내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의 편이었다.
그래서 나도 내 편이 되기로 했다.
어머니는 우아하고 남들이 뒷말할 건더기가 없는 가정을 원했다. 남들의 우상이 되고 싶으셨나 보다. 그런데 가장이란 사람이 자기 처자식을 죽어라 패는데요. 그리고 아버지의 폭력성은 아버지의 단점이지 내 단점이 아니다. 나랑 관련도 없고. 어머니께 말했다.
엄마, 우리 가족은 실패했어.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내 잘못도 아닌데 선택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나에게 주어진 이 가족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결국 내 인생을 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쓸데없는 힘을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냥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싶다.
우린 자식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도 자식이기에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갖은 힘을 다 쓴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말이지. 그냥 신이란 작자가(있다면) 랜덤으로 그런 가정에 우릴 꽂아 넣은 거다. 그래, 나도 그들의 자식이기에 혼란스럽다. 마음껏 원망할 수가 없다. 비참함만 느꼈다. 그때, 나를 담당한 상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분노하세요.
우린 분노해야 한다. 원망이 힘들다면 분노하자.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은 행동을 했고, 나를 상처 입힌 그들의 행동에 마음껏 화를 내자. 그리고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데 올인하자.
.....라고 잘난 듯이 얘기했지만 나도 잘 안 된다.
나는 공대생이지만 디자인 복수전공 과정 중이다. 그런데 최근에 학점이 모자라서 한 학기를 더 다녀야만 이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찾아온 우울증 덕에 학습능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최대한 전공 적게 듣고 무리하지 않는 학기'가 여기서 빛을 발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걸 알았을 때 '아 엄마나 아빠 한태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복수전공을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밀어줄 테니 꼭 학위를 따라'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는 진정 내가 학위를 따서 좋은 직장을 갖고 좋은 인생을 살길 바란 걸까? 그렇다면 왜 내 인생을 끝내버리려고 했을까? 그저 자신의 어깨를 치켜세워줄 '좋은 학력과 직장의 자식'을 바란 게 아닐까?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는 경제적 지원보다는 안정된 삶을 원한다. 집에서 쉬다가 언제 뜬금없이 욕 듣고 맞을지 몰라서 불안한 삶 말고.
자식은 점점 힘을 갖춰간다. 계속 어린아이로 남아있지 않는다. 힘이 세지고 키도 커지고 가치관도 생기며 돈을 벌겠지.
"너희 아빠는 지금 그게 무섭고 불안한 거야."
자신이 그랬듯 우리가 언젠가 경제력으로 괴롭힐까봐.
웃기지마라.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를 뭘로 아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자식의 도리는 다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다만, 죄책감은 갖지 않는 선에서만 하겠다. 만약 힘들다면 죄책감도 과감히 버리겠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두려웠으면 마음은 우릴 업신여기더라도 겉으로라도 잘해줬어야지. 그렇지만 그걸 모르는 아버지는 평생 불안해하면서 살아간다. 그건 아버지 자신의 업보이다.
이 나이쯤 되면 경제적인 지원은 필요하지만 부모님의 정신적인 지원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정신적 지주가 자기 자신 이어야 하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해나 공감을 받지 못해도 혹은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받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우리 아빠(혹은 엄마. 그런데 가정폭력의 주범은 주로 아버지이다. 그들은 물리적 힘이 있고 경제적 힘이 있다.)처럼 안 될 거야."
이미 우린 그들과 다른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 너무 가족에게 의미를 갖지 말라. 본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자식의 도리를 하자.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무리하지 말자.
+) 저 복수전공 이수요건은 나도 충격이라서 좀 생각해봐야 한다..... 그냥 철회할지 아니면 이수를 위해 한 학기를 더 다닐지. 확실한 건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 지금은 떨어져 살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걸 목격하면 망설임 없이 경찰을 부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