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꾸준히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고 있다. 물론 소량의 약이긴 하지만 작년의 나는 제멋대로 약 복용을 그만두고 다시 먹고를 반복했기에, 이번에는 적어도 3달 정도는 꾸준히 먹기로 했다.
괜찮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2주 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결국 의사 선생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느끼면 안 되는 감정은 없어요. 모든 게 아주 당연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자식이란 무엇일지. 자식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란 무엇일지. 10년 만에 마주한 우리 가족의 모순은 나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많이 맞은 그다음 날도 별생각 없이 아버지를 마주 보면서 밥을 먹고는 했다.
나이는 들었는데 약해진 걸까.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왜 그렇게 강했을까. 분명히 그 폭력성을 보면서 ‘아니야 그래도 우리 부모님이잖아’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건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우리 가정의 폭력성과 내 트라우마를 인정했고, 그 부당성과 나쁨도 인정했다. 그래도 애는 애였던 건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곳이 돌아갈 곳이라고 믿고 의지했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고 다시 마주한 그 폭력은, 집이 믿고 의지할 곳이 될 수 없음을 아주 판타스틱하게 알려주었다.
예전에는 집에 갈 날만 기대하면서 이 철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갑자기 돌아갈 곳이 없어지니까 너무 혼란스럽다. 돌아갈 곳이 없이 살 수 있다고 머리로는 아는데. 이제 그 모든 것들과 나를 분리시켜야 함을 아는데. 의지할 곳과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멍청이는 나잇값도 못 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이 해 주신 말,
다 당연한 감정이에요. 지금 철경 씨의 감정의 소용돌이 중에서 가지면 안 될 감정은 없어요.
감정을 통제하려고 했다. 어떤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면 힘들어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또 나를 탓하는 모습이 한심하고.... 무한반복이다.
몇 번째 얘기해서 민망하지만 정말! 혼란스럽다.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사람은 사람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사람을 놓아야 하는 것이 정답일 때도 있을까? 이 정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마음의 고향이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곳을 나 자신이 만들어야 함을 알면서도 의지할 곳을 찾고 싶다. 타인이 만들어 준 '의지할 곳'이란 이렇게나 쉽게 뺏기는 것이던가. 나 자신의 무력함과 내 힘의 원천이 없어진 허무함에 허덕이고 있다.
철학과 친구에게 추천받아서 잘 읽고 있는 명상록.
힘들고 괴로울수록 자아라는 작은 영역으로 물러서라_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머리로는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알 것 같다. 이제 도망치는 곳은 타인이, 다른 곳이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한다. 삶이란 요지경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다. 나는 나에게로 도망쳐야 한다. 말 그대로 홀로서기다. 세상은 그걸 나에겐 유독 터프하게 알려준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감정과 마음은 머리를 따라오기엔 한참 느리다. 그래도 머리로 알고 있으니 언젠가 마음이 따라가겠지? 그때까지는 그냥 감정과 함께 흘러가겠다. 그게 무슨 감정이든, 심지어 나조차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해도 나의 감정들이다. 억지로 무언가를 깨달을 필요도, 좋게 생각할 필요도 성장할 필요도 성숙해질 필요도 다 필요없다. 나 자신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