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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31. 2019

이 정도인 내가 딱 좋아.

다른 사람을 포기하고 한심한 나를 인정하다.

30살이 되고 제 안에서, 좋든 나쁘든 체념하게 되는 것들이 있어서, 자신의 싫은 부분이라던가 그런 자신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u튜브에서 우연히, 아라시의 멤버 마츠모토 준의 6년 전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덕질 중에 우연히 엄청난 공감되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무엇이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해서 나의 장점을 하나라도 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를 쌓아가면서 삶이란 내가 못 하는 걸 하나라도 더 알고 인정하는 과정임을 실감하고 있다. 그게 정말 좋든 나쁘든 말이다. 


포기나 체념이 예전에는 나약한 사람들, 능력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나약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못하는 건 포기하고 긴장을 풀면서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중, 완전히는 아니지만 체념하고 포기하니까 삶의 질이 확 높아진 것이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집착이다.


스무 살 이후로 친한 사람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관계를 유지하고 만들기 위해서 온갖 광대짓을 했었다. 이것 봐, 나 얘기 재미있게 하지? 나 네 이야기 잘 들어주지? 엄청 쾌활하고 멋지고 배려있지?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를 끊지 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집착했다. 워낙 주변에서 왜 친구 없냐고 이상하다는 가스 라이팅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임을 (누구에게?)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친하고 오래되었지만, 나를 상처 주고 같이 있는 것이 힘든 친구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고 내 곁에 두려고 했다. 사실 사람 한태 그렇게 관심 없는데도 수업시간 옆 자리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번호를 달라고 하고 그다음 만남을 기대했다. 어쩌다가 생긴 조별과제에서는 조원들과 친해져서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항상 비상등이 켜졌다. 야, 너 이상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이 짓거리 하고 있는데, 지금 너의 인생 중 가장 어색한 행동 하고 있지 않아? 사실 사람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등하굣길에 친구들이 말 거는 게 귀찮아서 일부러 이어폰 끼고 걸었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 입은 기분이었다. 


하나도 안 웃긴데 웃었다. 사실 혼자 있고 싶은데 따라갔다. 조금이라도 침묵이 보이면 어떻게든 채우려고 입과 머리가 계속 돌아갔다. 오래된 인연과는 알고 지낸 그 시간이 아까워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친구에게 무리해서 잘해줬다. 그 친구에게 나는 감정 쓰레기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지쳐서 나가떨어진 건지, 다시 평정을 찾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재작년의 심리상담 때 담당 선생님께 들은 한 마디가 이 모든 것에 긴장을 탁 풀도록 해 주었다. 

철경 씨는 같이 있어도 뭔가 혼자 있는 것처럼 느긋한 분위기가 나네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같이 긴장을 풀 수 있어요.


내가 긴장하면 다른 사람도 눈치챈다. 내가 굽어 들어가서 그 연을 끊지 못하면 은연중에 그걸 알고 함부로 대하는 친구도 생긴다. 관계라는 건 의외로, 내가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 어깨의 힘을 뺐다. 잘 보이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고 머쓱했다. 내가 긴장을 하면서 “얘도 나랑 별로 안 친해지고 싶어 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 졌겠지. 그래서 긴장을 풀었다. 물론, 여전히 많이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건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그래도 그가 나의 제안을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보단 그와 함께 할(수 있는) 시간을 기대하려고 한다. 


날 함부로 대하는 오래된 친구들에겐 맥이 풀렸다. 이젠 그들의 불행이 안타깝긴 하지만 내 일처럼 슬프지 않다. 그 친구의 인생은 나에겐 드라마나 소설 같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슬프면 마음은 안 좋지만, 내가 나서서 해 줄 것이 없기에 딱히 그 이상의 감정이 안 드는 것처럼. 만약, 그 주인공이 비극을 맞는다면 나에게도 후유증이 남아있겠지만. 그건 그 이야기가 슬퍼서 슬픈 거지, 그 친구가 힘들어서 슬픈 게 아니다. 나는 친하다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이것을 이 친구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인정하니까 어찌나 편하던지! 왜 사람을 무리해서 좋아하려고 했을까.

대신 내가 좀 더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려고 한다. 

그들이 힘들어 보이면 전화를 걸겠다. 내가 힘들어도 전화하겠다. 혹시 만날 일이 생긴다면 기쁘게 내가 할 일들을 때려치우고 만날 것이다.(시험:?) 그리고 그들에게도 나를 만나 달라 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건 많은 사람들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억지로 가졌던 흥미를 끊겠다니. 대신, 내가 가진 관계를 나쁘지 않다고 여기며 만족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니까 의외로 새로운 사람들이 생겼다. 오래되었지만 곯아버린 자를 떠나보냈더니 낯설지만 건강한 관계의 사람들이 생겼다. 오래된 소중한 친구들은 나더러 "돌아왔네"하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내가 많은 이들을 포기하고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깝나 보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얘기한다.

야, 내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친구로서는 진짜 좋은 놈이거든? 날 잃은 걔가 손해지, 뭐. 걔 인생에서 나 같은 친구 또 못 만날걸?

그러면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래”라고 해 준다. 저 헛소리를 긍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거봐, 나 꽤 괜찮은 놈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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