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서평. '똑독'
너는 나더러 데미안이라고 했다. 나는 데미안을 읽으면서 네가 생각이 났는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겐 데미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사람들에게 내 처지를 이해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다.
데미안을 다 읽고, 친구에게 선물을 주면서 이 문구를 엽서에 적어 같이 보냈다. 나중에 엽서를 발견한 그는 나더러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카톡을 남겼다. 나는 그렇게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보다는 네가 더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너의 한마디로 나는 너의 데미안이 되었다.
'데미안'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허세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이를 데미안이 도와준다. 데미안을 만나면서 싱클레어는 조금씩 자신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 그 틈 사이의 차이를 실감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우연히 오르골 연주자이자 목사를 준비하고 있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함께 이해해고 연구하면서 성장한다. 그렇게 다시 데미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고, 전쟁으로 그들은 흩어진다.
‘데미안’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1인칭은 싱클레어이므로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묘사하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만큼만 나온다. 그럼에도 그는 주인공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 분량이 적더라도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 싱클레어의 방황을 함께 해주며 조언해주는 이해자 피스토리우스도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싱클레어 또한 독특한 주인공이다. 글을 읽으면서 그를 보는 나의 시선과 감정이 몇 번이고 바뀐다. 그는 나인 것 같으면서도, 타인이었다. 마치 나에게 “너와 나는 비슷하거나 공통점이 있을지언정 다른 사람이며 세상에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선을 긋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이런 싱클레어에게 약간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서문부터 이런 문구가 있다.
세상의 많은 현상이 오로지 한번 그곳에서 서로 교차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점이다.
서문부터 미리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머쓱했다. 이 문장은 싱클레어와 독자의 만남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고.
남들과 다르다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다. 이해받지 못하면 외롭고 슬프기에. 이해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온갖 일은 다 했지만 결국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얘기한다. 이해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데미안은 그들을 '카인의 표적'을 달고 있다고 얘기한다. 카인의 표적을 갖고 있는 자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내가 남들과 다를까 봐 불안에 떨었던 적이 있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도 두려워해야 할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에 이 카인의 표적이 언급되었을 때, 조금 경계했다. 오래된 책이기에 혹시 이것이 우울증이나 조증 등의 정신질환을 ‘병’이라는 인식 없이 그저 남들과 다른 무언가! 하고 표현한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헤르만 헤세를 처음 접한 책이 '수레바퀴 아래서'였고 그 후유증이 꽤 길었기에 나도 모르게 경계했다.) 요즘이야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우울증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깨려면 본인이 겪어보는 수밖에 없지만 그러기엔 너무 대가가 크다... 여하튼 잠깐 딴 곳으로 이야기가 세버렸지만, 나의 걱정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헷갈렸다. 그러나 확실히 다 읽은 순간에서는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상관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정신질환을 잘못 묘사하지는 않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방황을 하던 싱클레어는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자신이 꿈에서 본 그대로를 그려서 데미안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굉장히 은밀하게 온 답장이 위의 문장이다. 우리가 데미안 하면 바로 떠올리는 그 유명한 문장.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는 오르골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조언을 들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진 마시오. 가령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오.
여기서 나는 피스토리우스(결국 작가지만)에게 감동받았다. 만약 그가 비교대상을 ‘백조’나 ‘까마귀’로 들었으면 아무리 죄가 없는 새들이지만 오래된 편견으로 우리는 백조와 까마귀 사이의 상관관계, 상하관계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통 백조를 더 고귀한 존재로 여기니까. 그러나 박쥐와 타조는 정말 뜬금없다. 조류라는 공통점 말고는 상관관계를 굳이 만들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둘 다 백조와 까마귀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개성이 느껴진다.
책의 이름은 데미안이지만, 피스토리우스 또한 만만치 않은 주인공이다. 오히려 데미안은 피스토리우스보다 어린 나이고 훨씬 더 어릴 때부터 등장해서인지, 데미안의 의식의 흐름에다가 어려운 말들을 피스토리우스는 이해를 시켜주고 다가오게 해 준다.
데미안의 주된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되,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를 잊지 말라는 데 있다. 중간에 우울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우울증이나 조증 등이 심한 상태의 사람들은 일단 내면의 세계에서 도망가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작가가 원하는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건, 일단 어느 정도는 건강한 상태여야 가능할 것이다. 내면에 세계가 그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기분이 든다면, 혹은 그대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기분이 든다면. 잠깐은 알 속에서 쉬어도 괜찮다. 알을 깨는 중간이라도 말이다. 약간 한 숨 쉬어도 괜찮다. 알을 깨기 위해서 밥을 먹거나 멍하니 하늘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그리고 다시 힘이 생기면 알을 깨자. 이건 보통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의 신은 우리를 항상 축복하고 있기에. 그대가 괴롭다면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또래와는 약간 다른 케이스였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성적이 좋았던 것도, 힘이 세었던 것도 아닌 내가 눈에 띄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나와 반대로 나의 친구는 너무 어렸을 때 자신이 남들과 노선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받은 상처가 많았는지 남들 앞에서 말하다가 그는 가끔 “이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하고 눈치를 보았다.
우리는 그 재수 없음마저도 인정하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진정한 싱클레어,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의 동료가 되자.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피차 서로라는 것이 있으니까.
싱클레어,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힘든 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
싱클레어, 꼬마!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겠지. 크로머나 그 밖의 일 때문에 말이야. 그땐 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쉽게 말이나 기차를 타고 갈 수 없을 거야. 그럴 때에는 자넨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 이 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적님의 '똑독'활동으로 쓰였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공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