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 놓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늦게 오셨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동생과 단둘이서 먹었다.
엄마가 아침에 싸놓은 반찬을 용기 그대로 데워서 내놓고 밥만 떠오면 끝인 식사였다. 당시에 오후 5시쯤 하던 tv 만화를 보면서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엄마가 일찍 들어오셨다. 나와 동생은 따끈따끈한 밥과 국물, 그리고 당시 가스를 못 쓰던 우리는 요리할 수 없었던 햄, 계란 프라이 등이 놓여 있는 식탁에 앉았다. 화려하고 맛있는 반찬, 밥, 엄마, 5시 tv만화가 함께 있는 그 상차림은 너무도 낯설었다. 그 낯선 순간이 여전히 그림처럼 기억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에게 정말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낯설어서 좋은 상차림도 있고, 익숙해서 좋은 상차림도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한식이란, 밥이란, 식사란, '상차림'이다. 누가 해주고, 누구랑 먹고,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가 전부 그때의 상차림이다.
또 '그거?' 다른 거 더 먹고 싶은 건 없고?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늦게 와서, 그리고 나와 동생이 늦게 들어오고 타지에서 살면서, 우리 가족은 식사를 같이 할 일이 더욱 없어졌다. 그렇기에 내가 집에 가는 날엔 엄마는 항상 미리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신다. 그러나 나의 답은 정해져 있다.
나: 그거. 그 김치 안에 고기 말린 거(몇 년째 이름 모름).
엄마의 모든 요리를 좋아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그거'다. 그거란, 길게 잘린 고기와 묵은지를 돌돌 말아서 끓인 김치찌개를 이야기한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먹은 적이 없어서 정확한 이름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집에 오면 그 음식을 찾는다. 늘 그 음식만 찾는 바람에 엄마는 가끔 섭섭해하신다.
'다른 음식도 맛있는데... 이것도 먹어봐 엄마가 어디서 보고 만들었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봐. 김치 필요 없어? 꺼내 줄까?(이거 김치찌개임)' 그렇기에 집에 온 첫날은 무조건 체하고 만다. 이것저것 권하는 엄마 덕에 입 안에 욱여넣다 보면 체하기 때문이다. 아닌가... 그냥 집에 오면 많이 먹게 되는 나 때문 일지도....
안 죽는다! 일어나! 먹어!
두 번째 상차림은 아버지 쪽 할머니, 할아버지 댁의 대나무 평상이다. 여기는 늘 고기가 구워지고 있다. 삼촌들은 알 수 없는 고기들을 어디서 구해오는지 항상 굽고 있다. 식사를 6시에 한다고 하면 4시부터 8시까지 계속 고기만 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의 대나무 평상 위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밑에는 신발들이 쌓인다.
내가 저 평상 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사실, 할머니가 급하게 한 계란 프라이와 상추, 강된장이다. 저렇게 먹고 평상 위에서 어물쩡거리면 어느새 다시 고기로 상이 채워진다. 여름엔 모기에 물리면서도 저기서 밥을 먹고 겨울에는 다들 목도리에 롱 패딩을 입으면서도 저기서 밥을 먹는다.
이번에 문어를 사 왔어. 소라도 있다.
아버지 쪽이 고기라면, 어머니 쪽의 할머니 할아버지 댁은 해산물이다. 갓김치와 꼬막무침은 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바뀌는 신선한 회들! 초장에도 찍어먹고 참기름에도 찍어먹고 간장에도 찍어먹는다. 그래서 밥보다는 회로 배를 채우게 되는데 그러면 또 밥을 먹으라고 할머니가 혼낸다. 그렇게 밥까지 우걱우걱 먹고 있으면 한과가 나온다. 한과를 먹으면 수정과나 식혜가 나온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캣스(개 이름이다)는 항상 우리가 식사하면서 티브이를 보는 동안 유리문 너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배가 고파서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께 여쭤보면 이미 밥을 주셨다고 하셨다. 그냥, 캣스는 우리랑 함께 있고 싶었나 보다.
나는 밥을 빨리 먹고 캣스와 함께 밖에 있곤 했다. 캣스는 매우 점잖아서 우리가 밥을 다 먹는 동안 풍경처럼 쳐다만 보고 있었고, 내가 나와도 방방 뛰지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멍 때리면서 계단에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그렇게 앉아있다 보면 저녁상이 차려지고 나는 캣스 밥을 주고 다시 저녁을 먹으러 간다. 그러면 캣스는 다시 저렇게 밖에서 우릴 쳐다보았다.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던 캣스는 풍경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얘들아 미안하다. 진짜 김치볶음밥이 최고네.
친구 자취방에 이것저것 사 들고 놀러 가면 아침에 꼭 김치볶음밥을 해 주었다. 벌써 3명에게 당했다. 게다가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서 밑에 받칠만한 상도 없었다. 집에 있는 이면지나 신문지를 끌어모아서 그 위에 프라이팬, 종이컵, 플라스틱 숟가락, 나무젓가락을 올려놓는다. 그때마다 장난 삼아 애들에게 "너네는 김치볶음밥밖에 대접할 줄 모르냐?"라고 했는데, 자취를 시작하고 김치볶음밥의 위엄을 알았다. 김치볶음밥은 집에 밥, 김치뿐일 경우에도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메뉴였다! 결국 친구들에게 "넌 김치볶음밥만 먹냐?"는 말을 되돌려 듣는 요즘이다.
아.. 사 먹었으면 돈, 시간 다 아꼈을 듯...
요리가 이렇게나 힘들 줄 몰랐다. 음식 하나 만든다고 거의 2시간을 쓴 적도 있다. 한 음식을 위해 도대체 몇 개의 조리기구와 조미료와 재료들이 쓰이는지! 난장판인 부엌에 비해 작은 트레이 위에 올려진 음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이왕 먹는 거, 잘 먹겠다고 예쁘게 담아서 먹는다. 물론 열심히 쌓아 올린 밥은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까지 '남을 위한 요리'를 얻어먹은 염치가 있으니까, 나는 나를 위해 요리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챙긴 적이 없는 내가 나를 위하는 과정은 소중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온갖 그릇을 뒤엎고, 깔끔하게 치우고, 맛있게 먹는다. 요리는 사진으로 항상 남겼다. 내가 나를 챙겼다는 증거는 볼 때마다 낯설었다. 그러나 소중히 할 것이다.
오늘은 새로운 요리를 해 봐야지. 앞의 네 개의 상차림을 준비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 중일까? 내가 한 요리 사진은 항상 엄마에게 가장 먼저 보내진다. 가끔 내가 요리를 한 것을 보고 "맛있겠다. 엄마도 오늘 그거 해서 먹어야겠다." 하는 답이 오면 뿌듯하다. 내가 곁에 없어야만 당신을 챙기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다. 엄마와 할머니가 차려준 상을 먹을 때는 한 번도 그들의 입에서 "이게 먹고 싶어서"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젠 내가 곁에 잘 없으니 그들만을 위한 상을 차려줬으면 좋겠다. 오늘도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상을 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