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Jan 09. 2020

시작도 끝도 별 거 없구나.

시계가 전부 고장이 나서 제주도를 갔다.

벌써 2020년인가? 월정리에서.


지금쯤 내가 보낸 여행 사진들을 봤겠지만, 고양이가 함께하고 있는 북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노트 set가 있어서 너에게도 하나 보냅니다.(나도 지금 그걸로 쓰고 있어.) 사진 스티커의 고양이들은 여기 있는 애들이야. 한 마리 근처에 있었는데 멍 때리는 사이에 없어졌어. 지금 읽고 있던 책이 '츠바키 문구점'이라고 대필가에 대한 이야기야. 게다가 고양이, 책, 커피, 바다, 제주도. 지금 어떻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있겠어. 노트북을 안 들고 오길 정말 잘했어. 이런 곳, 시간에서 멋없이 노트북으로 글 쓸 수는 없지. 태블릿이라면 작으니까 있어 보이지만.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는 손으로 끄적여야 해.


Je ne me tueria pas. On oublie si vite les morts.
난 자살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죽은 이들을 너무 빨리 잊거든.

(사진엔 오타가 났어. 급하게 적고 다녀서)

그래, 이 문구를 들고 다녔어. 너는 조금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살여행을 갈까 봐. 몇 년간 나는 죽음과 너무 친해져 버렸지. 그래서 외쳤어. 여기저기서, I'm Here! 난 여기 있다고! 젠장, 아직 살아있어! 죽지 않을 거야!

이번 20년도, 19년도는 나에게 엄청난 1년, 하루하루였어. 내가 너무 스펙터클하게 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내 이야기만 한 건지 너의 작년은 뭔가 인상 깊게 들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네. 날 매우 쳐라.




올해, 어 그니까 20년에 갑자기 나의 많은 것들이 끝났어. 아빠 퇴사(내 안정적인 생활), 졸업, 좋아하던, 내 대학생활 그 자체이던 카페의 폐업. 그리고 공교롭게 갖고 있는 시계가 전부 고장 났지. 내가 얼마나 시간에 허덕이는지 알지? 그래서 지금 제주도 여행은 완전히 시간'감'에 의존해서 대충 살아가고 있어. 인적성 시험처럼. 비유가 별로인데 취준생이니까 이해 부탁한다. 그 카페, 3년간 갔는데. 어제가 마지막 영업이랬어. 하필 딱 마지막 날에 갔더라고. 그 카페는 나에게 큰 의미였어. 길 잃고 들어간 그 카페의 라테가 정말 맛있었어. 


중간에 점원분이 바뀌었고 라테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둘 다 개성 있게 맛있었어. 첫 번째 분의 라테는 거품기가 거의 없이 담백하고 깔끔했다면 두 번째 분의 라테는 에스프레소 위에 거품을 잔뜩 올린, 비엔나커피 같은 느낌. 내가 오면 항상 바로 '라테'를 입력하시더라. 그리고 할인이 되는 시간이 따로 있었는데 그 시간이 아닐 때 가도 할인해주셨어. 말없이 할인해주셨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지. 서울에서 내가 이 정도로 익숙한 순간을 만들어낼 줄 몰랐어. 동네 카페 느낌이고, 이사한 집에선 좀 멀어서 굳이 데려갈 이유는 없지만 너를 꼭 데려가고 싶었는데, 이젠 나도 못 가네. 디저트 공방으로 바뀐다더라. 그래서 화과자랑 떡케이크를 주셨어. 분명 잘 될거야. 

"이젠 이 라테 못 먹는 거예요?"
"언제든 오세요, 만들어 드릴게요!"

예전 점원분은 지금은 한국에는 안 계시는데 친화력이 엄청 좋으셔서 나한테 연락처가 있었어.(신기) 그래서 이번에 마지막 영업이라고, 생각나서 연락드렸다고 연락해봤지. 라테가 정말 좋았다고. 그래서 언젠가 만나면 아이스라테를 함께하자며 기약 없는 약속을 했어. 기약 없는 약속. 집 돌아가면서 이젠 어디를 물색하지, 하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생각나더라. 나도 이제 곧 여기를 떠나더라.

어떤 신분으로 떠나게 될지, 모르겠는데 곧 계약 끝나니까. 그리고 제주도 도착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시작도 끝도 다 별 거 없고 허무하다고. 그 사이의 스며들 과정이 문제겠지. 뻔한 이야기네. 그러니까 올 해는 우리 부담 없이 끝내고 시작하자. 비 온다는데 나는 맑은 바다를 보고, 고양이 옆에서 글을 쓰고 있네. 휴대폰도 충전 맡겨서 몇 시인지도 몰라.



너한테 그런 얘기 한 적 있냐. 예전에 친구랑 장난치면서 '우리가 젊긴 한데, 젊음의 장점(활기, 체력, 도전정신)은 없고 단점(돈 없음, 막막)만 남았다고!' 하며 웃었어. 진짜 이 나이는 하루하루가 계속 바뀌어서 뭐가 뭔 지 알 수가 없다. 전부 낯설고 불안한 게 당연해. 그래도 우리 졸업하네. 그게 무엇이든 가볍게 시작하고 가볍게 끝냈으면 좋겠다. 


월정리는 너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꼭! 혼자! 와 보길 바래. 아니면 나 데려가. 여하튼, 사실 오늘 첫날이라 너한테 보낼 만큼 선물을 산 게 아니라서. 이 편지를 보내게 될지 모르겠네. 뭐 어때 이 분위기에서 누가 글을 안 쓸 수 있겠어. 그리고 쓰다 보니 '너'가 한 명이 아니네. 내 주변 누구에게 보내도 이상하지 않을 편지가 되었어. 이런 이야기를 심심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몇 있다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근데 지금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 써야겠다. 지금 진짜 몇 시지. 아직까지 찌그레기인 내 친구로 있어줘서 고맙다. 잊을만할 때쯤 내 칭찬해줘서 고맙다. 급작스럽게 끝. 아디오스.

결국 보내지 못 한 편지. 제주도에서. 고마운 많은 사람들에게. 쓰다 보니 너무 불특정 다수가 되어버려서 결국 간단하게 엽서로 한 명씩 하나씩 써서 보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짜증 나면 무언가를 만드는 버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