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추고, 나를 비워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 하는데도 한계가 있어야 해요. 계속 최선만 다 할 수는 없어요.
오늘 엄마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밭을 지나가다가 곤충을 먹이로 노리고 있는 새를 보았다. 그 새 뒤에는 새를 노리고 있는 다른 짐승이 있었다. 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밭의 주인은 그 사람을 도둑으로 오해하고 말았다.
하나만 계속 신경 쓰느라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상태는 아주 깔끔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또 생각이 난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에서 본 일화이다.
어떤 청년이 현자(였던가 성인이었던가 여하튼 세상에 만물에 통달한 그런 랍비 같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청년에게 은 숟가락을 주고 기름을 위에 부어주며 기름을 한 방울도 떨어트리지 않고 자신의 성을 돌다 오라고 했다. 청년은 숟가락 위의 기름에만 시선을 고정하여 성을 돌다 왔다. 그러나 성인이 말했다.
"제 성 안의 멋진 조각상들, 아름다운 분수대, 식탁 위의 멋진 만찬들은 보셨나요?"
숟가락에만 신경을 쓴 청년은 당연히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성인이 그것들을 잘 보라고 했다. 청년은 아름다운 성을 마음껏 구경하다가 다시 성인 앞으로 왔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숟가락의 기름이 어디 갔냐고 물었다. 성을 구경하느라 숟가락에 신경을 쓰지 못한 청년의 숟가락에는 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성인은 웃으며 말했다.
숟가락 위의 기름과 주변의 경치를 모두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있었다. 왜일까? 나는 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했을까?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를 비워내는 시간도 필요함을. 나를 비워내어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왜냐면 나라는 그릇의 크기는 정해져 있기에. 물론 그 그릇의 크기가 변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당장은 아니고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크기의 그릇을 가지고 넘치지 않게, 깨지지 않게 걸어가며 주변의 경치도 돌아보는 여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들려온다.
감히 어디서 취준생이! 다들 1분 1초가 아깝게 살아가는데, 심지어 요즘 공고도 없고 작년에 비해 서류도 광탈하는 주제에 어디서! 지금 당장 인적성 공부에 매진해도 모자랄 것을!
그러나 이런 의문도 나온다. 그럼 나는 언제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까? 이제 하나의 기간, 목표만 두고 삶 전체를 거는 베팅은 끝났다. 그건 중간고사였고 기말고사였고 대입이었고 졸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취업이다. 그러나 그 이후엔? 난 평생 애만 쓰다가 인생이 끝나는 걸까?
초사이언 모드가 괜히 초사이언 모드인가. 만화에서 주인공은 초사이언 모드로 등장해서 만화가 완결 나지 않는다. 정말 필요할 때만 그러고, 평소에는 다양한 다른 활동도 한다.
나를 비워내고 다시 채우기 위해 나만의 작은 행복을 일상에 하나씩 숨겨두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꽤 행복하다. 아침에는 운동을 하고, 라디오를 듣고, 커피를 내리고, 글을 쓴다. 이번 주에는 큰 그림도 그리려고 한다. 식비를 조금 아껴서 다양한 음료를 위한 재료들도 샀다. 셰어하우스 친구들과 시장도 가보고, 그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이미 너무 많이 읽어서 외운 책 하나만 덜렁 들고 좋아하는 카페로 간다.
숟가락 위의 기름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을 살펴보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서 숟가락 위의 기름에 집중한다.
그러나 둘 다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겠지. 그래도 둘 다 최대한으로 해내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이렇게 살아가면 그 어떤 막막하고 긴 시간도 과거로 보낼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