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태어났을 리가 없잖아요.
취업한 친구에게서 11시에 전화가 왔다. 밤 11시에. 아직 퇴근 전이고 혼자 남았단다. 사실 주변 사람들이 다 취업준비생이라서 말을 못 했는데, 더럽게 힘들단다. 취업 전에도 지옥이고 취업 후에도 지옥이라니. 지금 20대 중반인 우리는 ‘취업’이라는 것에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뭐?
이게 우리 인생의 다 일리가 없다고. 짜증 나네 진짜. 야, 솔직히 이 나이 겁나 젊거든? 애기란 말이야.
그렇긴 해.
그래도, 넌 취미 즐길 시간이 확실히 없긴 하다. 10분이라도 좋으니 좋아하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며 일 외의 다른 시간이라도 확보해라. 진짜 이 시기에 내가 좋아하는 거, 내 경제적인 능력이 허락하는 한 해야겠어. 내 인생이 취업준비와 합격 불합격으로 점철되게 놔 둘 수가 없다.
알았어. 저번에 카페 혼자 가니까 좋더라. 비싼 음식도 혼밥 해야지. 너는?
숲으로 갈 거야.
숲?
사람 많고 좁은 곳은 위험하니까. 넓은 곳에 가야지. 거기서 도넛도 사 먹을 거다.
내 삶이 이게 전부일 리가 없어. 그냥 어쩌다 보니 지금 해야 할 일이 취업 준비일 뿐이야.
어제는 아주 즐거운 날이었다. 굉장히 공을 들였고 결과도 기대했던 두 곳에서 무려 두 곳에서 시간차를 두고 서류 탈락 소식을 곱게 접어 사랑을 담아 보냈다.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하나는 내가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앞으로도 힘내 보자고 서로를 북돋는 전화를 끊은 직후에 왔다. 다른 하나는 친구들과 진지한 얘기를 한 후 서로를 토닥이면서 앞으로도 힘내 보자고 얘기한 직후였다.
왜 타이밍이 전부 이런 지. 항상 뭔가를 털어내고 겨우 일어났을 때, 혹은 맘껏 힘들어 할 수 없는 상황에 기가 막히게 그 편지가 와서 다시 나의 기를 꺾었다. 평생 이렇게 좋을 뻔했다가 다시 기분이 나락에 떨어져야 하나? 평생?
안돼 말도 안 돼. 이게 내 인생의 전부 일리가 없어.
분명 이게 다가 아닐 거야.
내가 태어난 이유 따윈 없고 인생에 의미 따위 두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 적어도 내 인생의 전부가 “준비”일 리가 없다. 학생 때는 대입, 수능, 대학생 때는 졸업, 이젠 취업. 내 인생이 준비와 준비가 아닌 기간으로 나뉘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안된다. 젠장, 만약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다. 앞으로도 지겹도록 남은 (이것도 희망사항이지 운이 없으면 앞의 미래마저도 짧을지도 모른다.) 이 인생에서 평생 ‘서류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따위의 말이 적힌 네모에 기분이 좌지우지되어야 하나? 취업이 되면? 그러면 내 인생 거기서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막을 내리나?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 이게 다가 아닐 거야. 과거에 우울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2년 전의 내가 울부짖는다.
어떻게 얻은 미래인데!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연장하듯이 겨우 살아왔는데. 언젠간 살아남는다는 생존이 아닌,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지내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런데 그 네모가 뭐길래. 경제가 뭐길래. 그들만의 사정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다시 지옥으로 끌어내리는가?
그런 것에 좌우될 인생이 아니란 말이야.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쓸 테다. 용돈 받아먹는 처지지만 가끔 비싼 커피집에서 아무것도 안 할 거다. 스펙과는 상관없는 흥미에 1시간을 쏟아버릴 테다. 1분 1초가 시급한 지금, 집에서 만든 음료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 층을 만드는 데 시간을 부어버릴 테다. 가만 두지 않겠다.
그렇게 오늘 이 글은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담아 그린 그림과 함께했다.
+)
오랜만에 컨설팅을 들으러 갔다. 자기소개서 첨삭을 부탁드리니, 하도 많이 봐서 나를 외우신 선생님께서 안타깝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철경 씨는 자소서는 이제 정말 다 됐지.
그냥 걔네가 지금 신입을 안 뽑을 뿐이지.
그래.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존재함을.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최대한 힘을 빼면서. 즐길 수 있는 건 놓치지 않고 즐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