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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내린 컵에는 일상이 담긴다.

그것도 꽤나 단단한 일상이.

by chul
"어떤 목소리는 마치 잘 부푼 커피 뒤에 천천히 물을 부었을 때 다양하고 매력적인 향기가 뿜어 나오듯 문장에 담긴 감성을 풍부하게 끌어올려 표현해주었다."- 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중.
드립1.PNG 이렇게 초안을 잡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커피 얘기니까 드리퍼를 그려보죠

내 목소리는 저런 풍부한 감성은 전혀 묻어 나오지 않고, 원두의 구별도 못 하는 사람이지만, 항상 드립 커피를 내린다. 드립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길수록 내 멘탈 붕괴의 시간은 짧아진다. 요즘따라 절망의 지속시간이 짧아졌음을 실감한다. 예전에는 얇고 길었다면 지금은 굵고 짧다. 속상한 일이 두 번 연속 터진 날이 있었다. 이렇게 뭘 하든 다 안될 텐데 뭐하러 살아 고배만 주야장천 마시고....라고 대놓고 절망하고 울면서 오늘 할 일을 마무리짓고 홈트레이닝을 하고 10시에 잤다.

제시간에 누워서 할 일까지 (제대로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마무리한 내 모습이 낯설어서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예전의 나, 그리 오래까지 가지 않아도, 한 2주 전? 아마 나는 같이 사는 친구들에게 괜찮은 척 했을텐데.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어딜 밖으로 뛰쳐나갔거나, 야식을 시켰거나, 술을 마셨거나... 어쨌든 남은 반나절은 이 분노를 어찌할 바 모르고 감당하지 못하느라 망쳐버리고 후회로 점철된 침대에 누워왔다. 그런데 왜 2주간 조금은 단단해졌는가? 그렇다. 나는 드립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가 유명한 카페에서, 이마트에서, 원두의 맛도 모르면서 조금씩 원두를 사모으기 시작하면서.

드립2.PNG 배경을 잘 못 선택한 것 같지만 그냥 계속 그려봅시다.

그렇다고 드립 커피가 나의 구세주, 여러분 드립 커피만 드세요 에스프레소 아주 싫어 무한 드립교!라는 말이 아니다. 내 일상의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일상의 조그마한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친구들과 내기로 7시 기상, 1시간 책 읽기 3주간 진행 중.
2. 드립커피.
3. 내 공간 꾸미기.

1로 인해서 나의 일상은 단단하고 건강한 패턴을 갖게 되었다.

대충 이렇다. 7시에 일어나서 세면대에서 타임스탬프로 사진을 찍는다. 바로 세수를 하고 유산균을 먹고 물을 마시고 선크림을 바르고 산책을 나간다. 7시 20분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잠을 깨기 위해 한 행동이라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비몽사몽 트위스트를 췄다. 그러나 2주가 넘자 주변이 보였다. 7시 20분이어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음을. 산책하는 사람은 많았고, 도로에 차도 많았고, 가게 문을 여는 곳도 많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간단히 밥을 먹는다. 이쯤 되면 잠은 깨지만 뭔가 확실히 집중하기엔 어려운 정신상태다.

오전 7시 30분. 나는 이때 드립 커피를 내린다.

드립3.PNG

작년에도 쓴 적이 있는데, 나에겐 커피란 아주 큰 의미이다. 자취를 하면서 모카포트를 장만했다. 홈카페 레시피들을 섭렵했다. 그러나 취업준비생이 되고, 쉐어하우스에 살면서 나의 개인 공간은 하나도 없어졌다. 이제 나에겐 커피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카페에서 외쳐서 빠르게 마시고 빠르게 다시 노트북에 앉아서 귀사의 지원동기를 쓰는 각성제 정도가 되어버렸다. 한때 나를 살렸던 커피를 이렇게 대하다니, 아둔했다.

드립 커피의 매력은, 내리는 동안 드립 커피에 발이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1분, 짧게는 20초면 원두에서 물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 20초와 1분 동안 폰을 하거나 무언가를 하려는 당신? 그게 나다. 반성하자. 언제부터 10분도 아까워하면서 살았던가. 만약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나는 지금 취준생이 아니라 어디 대기업 최연소 임원이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내 시간 10분 정도는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시간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냥 내려가는 것을 본다. 원두가 많이 섞여서 내려가는지, 어디까지 찼는지, 보다가 맘에 들 때 꺼내서 원두를 버린다. 한 입 마시고 쓰며 물을 조금 넣는다.

드립5.PNG 맑은 하늘 커피가 완성되었습니다!

나에게 멋지고 비싼 드리퍼 같은 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원두 이름도, 종류도, 특징도 모른다. 원두들은 제멋대로 갈려져 있으며, 나는 그냥 종이컵 한쪽을 뾰족하게 해서 가늘게 물을 내린다.

가끔 카페에서 드립 커피를 시킨다. 맛은 잘 모른다. 하지만 드립 커피가 얼마나 내리는 사람의 발목과 시선을 붙잡는지 안다.

종이컵으로 물을 내리면서 생각한다. 나에게 드립 커피를 줬던 사람들을. 강릉이었고 바닷가였고 제주도였고 집 근처였고 젊거나 나이가 있거나 가끔은 융드립이었거나 특이한 드립 도구를 썼거나 원두는 곱게 갈렸거나 투박했거나 여자였거나 남자였거나 아니면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수도. 어찌 되었든 그 모든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드립을 내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 내 시간을 소중하게 다뤄줬을지도 모른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의 시간을 위해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렸을 테니까.

드립7.PNG 그림 끝

그리고 마지막!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쉐어하우스는 개인 수납공간이 분리되어있다.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원두, 음식재료들로 쌓아놓았다. 잘 쓰지 않는 책상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정리했으며, 예쁜 스티커와 엽서를 내쪽 벽면에 붙였다. 그제야 내 책상은 누가 봐도 내 잭상이 되었다. 그래, 여긴 독서실이 아니었지. 잠깐 아무 자리나 잡아서 잠깐 할 일만 하고 어디든 괜찮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여긴 내 집이다. 쉐어하우스에 산 지 4달째가 되어서, 내 집으로, 내가 돌아올 곳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로 가득한 노트가 있는 책상, 내가 좋아하는 엽서로 가득한 한뼘짜리 벽면, 내가 좋아하는 원두와 커피 기구로 가득 찬 맨 왼쪽 서랍장.


나의 하루는 여기서 끝나고,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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