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Nov 29. 2020

내 불행이 네 위로가 된다고 착각한 적이 있다.


내 불행이 누군가의 위로가 된다고 착각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도 자주 착각하고 있다. 상대방도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항상 친구들과 서로가 잘 안 되어감을 얘기할 때, “야 너는 그래도 이것저것 했잖아, 나는 말이야 정말 한심하다고”라고 위로하듯 얘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대화는 어느새 서로의 불행 배틀로 변하게 된다.

사실 내 불행과 누군가의 불행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뭐라고.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와 그 친구가 ‘관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내 불행을 들먹이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는 적어도 나보다 낫다’는 위로 말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위로란 무엇일까, 위로를 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하게 묘사되는 게 현실이다. 나 또한 내 불행을 얘기하면, 그것이 ‘전시’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에너지 뱀파이어가 될까 봐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내 나름의 기준을 세웠는데, 불행이 전시가 아니라 전달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시간이 ‘대화’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짜고짜 내 불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그 불행이 어떤 것인지, 차근히 얘기하며 자 신또 한 그 친구의 불행을 언제든 들어줘야 한다.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나는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물론, 불행할 때 이것저것 다 생각할 수 있는 강철 멘털이 많으면 얼마나 많을까 싶다마는.


이렇게 불행 얘기를 듣다 보면,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친구가 울 때, 그 친구가 민망하지 않게 눈물을 모른척하며, 속상한 게 당연하다고 얘기한다. 이게 내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쑥불쑥, 내 불행이 나오며 ‘너는 나보다 나아, 내가 더 한심해 그러니까 속상해하지 마’같이 도움이 안 되는 말이 머릿속에 나온다. 혹은 ‘네가 우니까 속상해’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나의 속상함때문에 그 친구가 마저 못 울까 봐 걱정되어 다시 그 말도 집어넣었다. 



어쨌거나, 한국은 아직 운다는 것을 민망해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못 본 체를 하였다. 그러나 그게 최선이었을지는 모르겠다. 내 최선이긴 했지만 최고의 위로는 아니었겠지. 친구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는, 배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무도 다른 우리가, 우리의 다름 때문에 말만 꺼내면 서로가 삐걱대는 사이가 된 우리가. 너무 낯설어서, 같은 교복을 입던 우리가 이제는 너무 다른 불행에, 너무 다른 우주에 빠져 살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 우주의 조각뿐이라서. 대화를 하는 건지 우주 불행 배틀을 하는 건지 모를 때, 나는 지치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