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의 눈보라와 그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아주 성난 파도의 바다를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일자리 하나 얻을뻔했다가 못했다고 너무 오버했나. 눈보라나 파도에 휩쓸려서 사고로 죽기엔 나 너무 어린데. 속상하다고 나를 위하겠다고 혼자 3만 원짜리 식사를 시키고 그 어마어마한 양과 어이없는 가격의 영수증을 보고 인정했다. 아이고 나 궁상도 궁상을 지지리 떨었다. 그리고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뭘 먹어도 어차피 입맛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어떤 멋진 것을 봐도 진심으로 감격할 순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동기들과 다르게 혼자 다시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간 사실을 눈보라나 파도나 맛있는 음식이 없애주진 못할 거니까.
어딘가의 책이나 영화처럼 파도를 보며 '아, 이 대자연! 나에게 세상 일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주는구나! 이 모든 건 아무것도 아니로다! 하하 난 다시 태어났다'라는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파도 보면서 든 생각은 '우와 저기 휩쓸리면 춥겠다.'였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무작정 왔는데 흐린 하늘에 눈바람에 성난 파도는 주춤거리기 딱 좋았다. 위로가 된 것은 의외로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생각이 많았는지 혼자서 카페와 바닷가를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과거에서 계속 살 줄 착각했다. 아주 큰 착각임을, 바다와 눈보라가 내 뺨을 치면서 나는 현재에 있음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그래 그게 정말 내 일이 됐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랜 취업 준비 기간이 끝나서 동기들과 함께 입사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 현실은 나는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백수라는 것.
바다도 여행도 날씨도 친구도 다 나를 실망시킬 수 있지만 내 마음을 내가 속상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다 각자의 사정이 우선이고 나를 적절하게 위로해 줄 수는 없었겠지. 그래 봤자 나는 결국 남이니까. 하지만 나는 나만의 편이 되어줘야 한다. 링 위에 올라가는 건 나 혼자니까.
이 궁상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래갈지도 모르겠다. 힘이 생각보다 빨리 나지 않는다. 여전히 근무하는 꿈을 꾼다. 다음 주면 나와 동기들은 아주 다른 아침을 맞는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마음은 수시로 찌르듯이 아프다. 바다를 봐도 뭔가 엄청난 깨달음이나 기분 풀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추워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너무 멀리 왔다. 그냥 이런 거구나. 바다도 별 거 없네. 내 현실만 덩그러니 남았다. 결국 나는 여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