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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y 30. 2021

대답하지 않을 권리.

가끔은 거리두기가 정답일 때도 있다.

(20대 얼마 안 남았으니 이 브런치 북 얼른 써야겠다 싶어서 생각난 김에 후다닥 쓰는 글)


별 거 아니지만, 여러 관계를 맺으면서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무례한 상대나 상처 주는 전화에는 답하지 않아도 된다’였다.

 거리를 두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 더 좋을 때도 있다.

누구나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만 자신을  설명하는, 혹은 관계된 단어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자존심’이 그렇다.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이 높다는 얘기를 듣고싶다보니까, 자존심이나 고집이라는 단어는 절대 나와 관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내게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야,’라고 하면 나는 그 순간부터 아주 오픈 마인드인 사람임을 그에게 보여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누가 답하기 싫은 이야기를 질문하더라도 쿨한 척, 자존심 없는 척, 전부 답하고 알려줬다. 문제는 나는 상대방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은 자신의 정보를 내게 최소한만 주고, 최대한의 내 정보를 알아가면서 ‘통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 몇몇은 내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통제권을 행사하려고 한다. 최근에 몸이 좀 안 좋아서 한숨 쉬고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굳이 답 할 필요가 없는 질문들에 일일이 답해왔음을 알았다. 취업 준비를 하는 나를 돕겠다며 내가 어디를 지원했는지, 어디까지 전형이 진행되는지 꾸역꾸역 알아내려고 했던 지인들이 몇 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 할 일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게 어떤 권리로 ‘숙제’를 내며 본인들에게 제출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컨설턴트나 선생님, 인사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내 또래의 하지만 나보다 취업을 빨리 한, 그냥 신입사원들이다.

해야 할 일을 전부 정리해보니, 그들에게 내가 왜 그렇게까지 제출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돕겠다며, 자존심 부리지 마라고 자신의 도움을 받으라고 계속 말을 했지만, 그건 하나의 가스 라이팅이었다.


그래서 적당하게, 내가 할 일이 있으니 그건 시간이 되면 하겠노라고 거리를 두었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하고 나서 플러스 알파로 그 우선순위를 뒤로 미뤘다.



최근에 아버지와 말을 텄다. 원래 말을 자주 하는 관계는 아니지만(내가 서늘한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말을 해봤자 상처가 돌아오곤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기에. 하지만 나는 성격이 안 좋다거나, 말을 안 듣는다거나, 그런 인상을 누구에게도 주기 싫어서 아버지의 말을 그냥 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슬슬 아버지는 선을 넘는 비난을 뜬금없이 하기 시작했다. 외모에 대한 지적부터, 내 삶에 대한 회의(내가 내 삶에 회의가 없는데 왜 아버지가?), 결과가 중요하다는 뜬금없는 당연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 우리에겐 약간의 거리가 필요했구나. 이후로 인격적 모독으로 도를 넘는 문자에는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든 본인이 편한 게 최고다. 물론 예의를 차려야 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는 일으키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이 말을 왜 들어야 하지? 이 사람에게?’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너무 많이 들어줬기 때문이다. 계속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나를 ‘오픈마인드에 어떤 말이든 잘 수용하는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오산이다. 그냥 그들은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얘한테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무례해진다. 선을 넘는 것까지 알려고 했다. 그 상황에서 모두를 설득시킬 수는 없다. 그냥 묵비권을 잘 행사할 수밖에.


최근에는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바에야 자존심 강한 재수 없는 사람이 되겠어’하고 결심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내 삶 잘 살고 있는데 왜 다들 나를 벌써 실패자로 몰고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종용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원하는 삶 본인들이 살아가면 안 될까? 안 그래도 피곤한 취업 준비생 건드리지 말고... 혹 내가 ‘남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실패를 하더라도 목 위에 머리 달려있으면 또 삶을 가꾸어 나갈 텐데.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굳이 전해질 필요는 없다. 이 관계에서의 뒷걸음질이 나를 지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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