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울었으면 할 일을 하자.
갑자기 커피 이야기를 해 보자면, 드립 커피는 마지막에 너무 오래 기다리면 커피가 써진다고 한다. 처음에 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을 때, 조금 붓고 기다리고 조금 붓고 기다리는 게 싫어서 한번 붓고 다른 일을 했다.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커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완성했다. 차라리 집중해서 커피만을, 내가 마실 커피만을 위해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내리는 게 더 맛있고 뿌듯하다. 그리고 다른 기구나, 방법을 쓸 수도 없다. 그냥 물을 떨어트린다. 오로지 중력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정직하고 당연할 수가 없다.
모든 일을 드립 커피 내리듯이 하고 있다. 집중해서 정성스럽게 예의를 차려서 한 번에 한다. 당연하게도 내 노력만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내 전공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까 봐 조심스럽지만…. 그 어려운 역학 수식, 정리, 정의들 중에서 유독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해야 하는 일의 크기는 결국 같다는 진리. 내가 절벽을 클라이밍 해서 한 번에 올라가면 빠르다. 하지만 굉장히 힘들다. 목숨도 꽤 위험하다. 하지만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면 훨씬 수월하다. 목숨도 안전하다. 정말 운이 안 좋아서 머리로 콩콩 내려오지 않는 한,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전하다. 거리와 시간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어진다. 결국 고생의 정도는 굳이 굳이 모아서 합해보자면 같다. 뭐 일의 총량의 법칙인가 뭔가 멋있는 이름이 있었지만 졸업한 지 꽤 됐으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과 선택을 미루지 말자는 이야기를 전공을 살려서 한번 해 봤다.
애매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중에 오는 좌절의 크기도 커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충동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빨리 정해서 그에 몰입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팔자에도 없는 코딩을 공부하고 있다. 어차피 관련 직무에 관심이 있고, 시험도 생겨버렸고(서류 적을 때만 해도 코딩 테스트 없었잖아욧!) 내 전공을 살리기엔 늦었겠다, 관련 자격증 시험도 내년에나 있겠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통과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며칠 밤새 공부해보니까 더욱 잘 알겠다. 왜 전공한 사람들도 몇 달을 공부하는지. 그렇다고 안 할 순 없었다. 정확히는 ‘안 하는 주제에 다가오는 시험 일정은 신경 쓰이는 상태’로 일주일을 지낼 순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떨어지면 적어도 ‘에휴 어쩔 수 없네’로 끝낼 수 있었다. 이 계기로 미뤄두었던, 하지만 언젠간 공부할 것 같았던 코딩을 2년 만에 공부하면서, 나중에는 코딩 테스트를 칠 정도의 실력을 올려서 직무의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사는 곳을 12월까지만 살기로 했다. 그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서 결론을 낼 생각이다. 관련 공부들을 하고 있고, 철판을 깔고 여기저기 물어볼 준비도 하고 있다. 애매하게 예의를 차리다가 상대방도 나도 의문만 남는 대화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물어봐서 상대방이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도록. (거절은 그분들의 몫이라고 넘겨버리자!)
드립으로 라테를 내리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재료, 노력이 들어간다. 우유가 필요하고, 원두는 드립만 마실 때보다 더 많이 갈아 넣어야 한다. 진하게 내려야 하기 때문에 계속 저어줘야 한다. 현재 이 상황에서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번거로움은 불가피하다. 밍밍하고 쓴 커피를 10분 넘게 만들지, 5분 안에 맛있는 라테를 만들지. 그 무엇도 싫다면 결국 인스턴트커피가루로 빠르게 마시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 모두 정성스러운 드립에 그 커피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부푸는 원두를 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갈아 넣어서 블렌디한 그 원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