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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Dec 29. 2021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올해 나는 멋졌다.

뒤늦게 크리스마스 일러스트 그리면서 하는 혼자 하는 전쟁 이야기  

잘 살아가려면 외로움도 함께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나 시간, 혹은 나보다 능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가 내 삶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나보다 더 내 취준 생활을 신경 쓰는 어머니께, 차마 그 주에 면접에 몇 개씩 잡혔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끊어주신 헬스를 미팅 및 다른 일 핑계로 못 갔다고 지나가듯 말했을 때, 전화로 10분 넘게 왜 가지 않았냐는, 그럼에도 헬스를 가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 일로 다른 핑계를 대었지만 피곤하거나 지쳤을 나는 당신에게 없었다. 당신에겐 살을 빼서 외적으로 나아져야 하는 딸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입장 또한 나를 타인 중 제일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의 입장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외로웠고, 인정했다. 우리는 잘 살려면 앞으로도 더 외로워야 할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올해 나는 멋졌다. 눈을 맞으며 일정이 끝나고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며 겨우 숨을 쉬었다. ‘야 진짜 멋짐 그 자체였다.’ 중얼거렸다.

올해 나는 1년이 되어가도록 한 트라우마에 갇혀 살았다. 몇 번이나 우려먹어서 사골국도 안 나올 나의 인턴 이야기. 그리고 무례했던 동기들. 유일하게 떨어진 인턴으로 출근한 일주일. 처음에는 그 경험 자체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고 착각했다. 웬만한 일에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흠, 전혀 아니었다. 안 좋은 경험 자체가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 경험과의 족쇄를 끊어내는 이후부터, 더 이상 그 트라우마에 힘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부터 나는 성장했다. 하지만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을 울부짖다가 한참 뒤에 극복하는 경험보다는 애초에 그 트라우마를 갖지 않는 깔끔함이 훨씬 낫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무탈함을 빈다. 산전을 다 겪어서 뭐라도 깨달은 순간보다, 별일 없는 일상이 여러분께 가길 바란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여러 일이 벌어졌다면 그냥 거기서 뭐라도 얻어낼 수밖에 없다. 인생이 아주 길기 때문이다.

인생이 더럽게 길었다. 죽으려고 간 바다 여행은 오히려 해가 뜨는 장면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멋졌다. 지금도 멋지다. 인턴 동기들과 사수님 부장님께 선물을 주고 나왔다. 단순히 떠보는 의도가 분명한 면접 제의는 ‘채용 절차가 확실하기 전까지는 생각해보겠다’며 보류했다. 그렇게 나 대신 들어간 다른 동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현재 자기 삶이 불만족스러워서 아직 취준 중인 내게 우월감을 느끼며 그 회사 인턴으로, 자기 후배로 들어오라던 망언을 퍼부은 동기는 차단했다. 돌아오지 않으려던 그 여행에서 해를 보면서, 인생의 희망 따윈 느끼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표를 예매했다. 결국 난 질기게 살아있을 거고 내 앞의 수많은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 것도 나 혼자라는 사실을 시리도록 깨달았기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서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귀가했다. 사원증을 위해 비워놓았던 자리에 인적성 교재를 올려놓았다. 이후 모든 인적성 시험은 통과했다.

나는 범신론자다. 하지만 범신론자답지 않은 실험을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믿는 것뿐이라는 실험이다. 결과가 어떻든 언제 어디서 시작하든, 그게 나의 시기이고 제일 좋은 때이고 장소일 거라고 믿는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나의 모든 것들을 안 좋게 돌아가게 한다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창조주라면, 내가 공들여 만들고 관리한 존재나 시스템이 문제없이 굴러가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길 빌 것이다.

투덜거리고 망했다고 말하며 현실적인 사람이 되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울상을 지었고,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내가 초라하다고 외쳤다. 멍청한 사람보단 불쌍하고 일이 잘 안 풀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딱히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저 태평하고 멍청한 사람처럼 보여도 상관없다는 긴장 풀린 어깨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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