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우답 여섯 번째. Q: 열등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현문우답 몇 번째.
Q: 열등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A 자신을 소중히 하세요. 용서하거나. 남은 … 알아서 하시고요.
요 몇 년 새, 똑같이 코질질이었던 친구들이 빠르게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창 취준을 할 때, 서류를 겨우 뚫으면 면접에서 누군가의 스파이크를 받은 배구공보다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저는, 더욱 그 격차가 실감만 날 뿐입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집을 꾸미고 인센티브 100%(안 그래도 대기업이라 순수 월급만 해도 굉장함)를 받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씁쓸해지긴 합니다. 노란 장판 같은 코트 바닥에 맨날 중력보다 빠른 속도로 얼굴을 쳐 받는 제게 위로랍시고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야, 걔네 얼마나 갈 것 같아? 원래 처음 잘 된 애들이 나중에 더 안돼. 네가 더 잘될 거야.
정말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송구스러운데 제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걔넨 걔네잖아요. 걔네가 못 된다고 제가 바닥에 머리 박은 횟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요. 차라리 열등감을 인정하고 말지, 지인의 안 좋은 소식을 굳이 굳이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들이 계속 승승장구해서 제게 밥이나 한 끼 더 사주는 게 더 낫습니다. 요즘 초밥 맛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제 일이 있습니다. 꼭 기업만이 아니어도 자신의 일을 찾아갈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요.
느끼셨나요? 위로에 묻어있는 ‘안타까운 사람, 잘 안 되는 사람’을 향한 안쓰러움을? 그 안쓰러움은 누가 주었을까요?
사실 제가 그렇게 저를 안쓰럽게 생각했습니다.
원래 제가 생각하는 대로 남들이 저를 대하니까요.
안쓰럽고 불행하고 한심하고 그런 위로라도 얻어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해왔지요.
용서하세요, 그럴 수밖에 없던 자기 자신을.
저의 열등감의 출발점은 ‘우린 한때 같았는데’였습니다. 같은 졸업장, 같은 전공, 비슷한 학점, 좋아하는 카페를 찾아가는 횟수, 입맛. 한 끗의 차이였는지 대양을 가를 만한 큰 차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공한 20대의 표본 = 대기업 입성’이라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저는 출발점으로 갔습니다. 그들과 제가 차이가 없던 때로요. 그리고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혐오했어요. 걔들 인턴 할 때 넌 왜 학점에만 매달렸어? 걔들 동아리 할 때 넌 왜 아파서 빌빌거리고 있었어? 걔들 외모 꾸밀 때 넌 왜 절망해서 집 안에서 살만 쪘어?
나 자신이 그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유는 찾아내면 많습니다. 저 위로대로 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서이기도 하고요, 그때 저는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부 다 제치고 하나면 충분합니다.
지금 제가 괴로우니까요.
저는 저를 소중히 여기기로 했습니다.
무언가 잘 안 되면 또 좌절하겠죠. 폼 없게 울기도 할 거고, 또 누군가에게 위로처럼 보이는 비아냥을 듣기도 할 거고요. 어쩌겠어요, 그래도 삶이 계속되잖아요. 저는 돈 좀 모아서 강남의 한 회전초밥집에서 혼자 엄청 많이 먹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이볼도 같이요.
저는 앞으로 제가 더 잘될 거라는 위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 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나와 저 사람들의 삶을 한 곳에, 한 기준에 욱여넣는 것 같아서요. 누구는 별을 잡았고 누구는 꽃을 잡았는데 그 둘을 똑같이 바다에 넣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제가 삶을 택한 이유는 ‘생각보다 죽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나 좋을 대로, 최대한 내가 좋게’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우면 버리고, 용서하고, 소중히 여겨서 좋게 좋게 지금 현재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밖에 모르는 상종 못할 인간이라도 좋으니 즐겁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게, 제가 열등감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별 거 없네요. 괴로우면 과감히 도망치고 그런 한심한 나를 용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