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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Jan 22. 2022

방치되어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불행이다

거기 그대로 두고 그냥 직접 걸어 나가면 된다.

아주 허접한 밑그림

나는 비참함이나 비극에 중독이 되곤 한다. 내 삶의 주도권을 남에게 주면 편하기 때문이다. 그냥 피해자로 살면서 계속 남 탓하고 인정이나 구원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도 가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 주도권이 없다며 모든 걸 포기하고 구원만을 기다리기. 시험 전까지는 미친 듯이 공부하다가, 시험 이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할 것이 없어서 빈둥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착각이다. 왜냐면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살고, 책임도 내가 지니까. 하지만 많은 외부적인 요소들로 삶이 흔들리면 마치 주도권은 내게 없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제 결과는 하늘이 주는 거야.’가 아니라 ‘내가 뭘 더 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라며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게 은근 쏠쏠한 재미가 있다. 방치가 이렇게나 쉽고 재미있다니!

색이 왜이리 우중충하냐면 제가 요즘 빈티지에 빠졌기때문입니다.

그 상황에 나를 가둬놓고, 더 밑으로 끌어당기면서 ‘나는 이렇게 비참하니까 누군가가 나를 꺼내 주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라며 침대에 몸이 편하게 누워있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남들이 보기에도 꽤나 외부적인 요소나 운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했다.

대학생일 때 애매한 복학으로 학번이 갈려서 과 안에서 친구들을 사귀기 힘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 + 서울 작은 고시원 + 고향까지 버스 6시간 + 어렵다고 소문난 전공 공부 환장의 콜라보로 본격적인 우울증에 들어갔었다. 당연하지, 아무도 나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내가 몇 시간 동안 학교도 안 가고 밥도 굶으며 자연광 대신 바퀴벌레가 깜짝 방문하는 방 안에서 보일러의 쾅쾅 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다들 이해해줬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사람답게 산다. 심지어 많은 파이프들을 연결하면서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게 그들의 위로와 이해덕이었을까? 누군가가 갑자기 내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주어서? 내가 청년 주택 어쩌고에 당첨되어서?

아니다. 구원의 시작은 내 한걸음이었다. 그 방 안에서 하늘만 보고 있어서 아무도 날 구원해주지 않았다. 우울증과 평생 친구가 된 이후, 세상을 향한 첫걸음은 카페에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러 가는 걸음이었다.

커피 하나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적어도 자신의 기분만큼은 내가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그 시작과 과정이 더럽게 힘들고 무거울 뿐이다. 그러니까 남 탓과 구원 대기에 중독이 된다.

요즘 하늘 왜케 꿀꿀한가요 눈이 많이 와서 그런가요?

다른 이야기가 또 있다.

내가 취업준비를 오래 한 편이고, 남들에 비해 스펙이나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서 그런지 컨설턴트분들과 마주칠 때 혼이 자주 난다. 그중 딱 두 명이, 나를 지적하는 듯하면서 나의 외모부터 인격적 모독까지 한 적이 있다. 스트레스로 찐 살 때문에 면접에서 자기 관리가 안 된 사람으로 걷는 순간부터 탈락했을 것이며, 이력서 사진은 보기도 싫고 화장은 그게 최선이냐는 말을 두 번 들었다. 처음 한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그 후유증에 며칠을 울었다. 그 사람은 전문 가고 나는 취업도 못 한 지질한 사람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다 나를 싫어할 거고…….

두 번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정말 민망하고 부끄럽고 굴욕적이었다. 그 사람을 보내고 혼자 남아서 커피를 홀짝였다.

맞는 말이야. 내가 자기 관리를 좀 못 했고 여기 올 때 면접 때만큼 정성 들여서 꾸미고 온 것도 아니지. 그런데…
저건 그냥 막말 아니고 막말 아닌가? 저보다 10살은 많으신 거 같은데 상대방이 수용하기 쉽게 말하는 능력이 좀 부족하신 듯.


맞는 말, 내가 기분 나빴던 말, 하지만 사실이고 내가 적용하면 좋을 말들을 노트에 적고 나왔다. 그곳에 계속 나를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이나 취업준비와 같이, 경제적인 결과가 달린 무언가를 오래 하다 보면 여러 공격을 당한다. 잘 안 ‘되었다’는 죄목으로 별별 소리를 다 듣게 된다. 입장,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거기 계속 있을지 나올지만 결정하면 된다.

얼렁뚱땅 완성


남 탓만큼 재미있고 구원을 기다리는 것만큼 매력적이고 편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남이 잘못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줘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책을 읽거나, 자격증 시험을 접수하거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진 않다. 하다 못해 동물 사진이라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무의미한 발버둥을 칠 바에야 방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방치만으로도 너무 괴로워서 무의미해도 좋다고 기를 쓰고 발버둥을 쳤더니 2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불행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고 착각하지 말자. 불행이나 비참함이 내 매력은 될 수 없을뿐더러, 그냥 지나다 가다 맞은 것뿐이다. 돌부리 걸려 넘어졌다고 돌부리 생각하면서 엎어져서 운다고 누가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다들 얼마나 바쁘게 사는데. 그냥 계속 투덜대자. 투덜대면서 일어나서 상처 부위도 보고 먼지도 털고 피나면 닦고 약도 좀 바르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돌부리는 희미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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