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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Feb 23. 2022

난 결국 너를 불편해했을 거야.

야 이젠 우리도 불행이 피곤한 나이 아니냐?

그 애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S와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멈칫했다. 당시 우리는 A라는 친구에 대해서 비판을 가장한 부러움과 시기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A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꿈꿨고, 모든 어린이들은 착하다고 믿었다. 이미 가족부터 시작해서 여러 어른들에게 많은 걸 당해온 나와 S는 그의 착한 성정이 부럽다 못해 탐탁지 않았다. 야 우린 꽈배기처럼 꼬였는데 쟤는 뭐가 저렇게 해맑냐. 그런 S의 말을 들으면 나는 웃으면서 우린 꽈배기가 아니라 망쳐버린 실뜨기 실타래라고 대답했다. 그럼 서로 절레절레하면서 급식실까지 뛰어가곤 하였다. 


그런 S가, A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그 이유가 그가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나 당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 불행하기 싫고 짜증 나니까’라는 이유임을 알았을 때, 결국 알았다.

난 그를 불편해할 것이라는 미래를.



지금 생각해보면, S는 A를 꽤 좋아했다. 불행만 말할 줄 아는 우리는 A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A는 불행해야 했다. 

그러나,  S가 나를 찾을 때는 힘들었을 때뿐이고 행복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다닌다는 사실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더 이상 함께 불행에 중독되어 불행을 먹고 또 불행을 내뱉는 일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S야, 나는 너의 전화를 받고 그런 이야기를 했지. 너의 전화는 불행할 때만 온다고. 너는 즐거울 때 나를 생각한 적이 있냐고. 그래서 너는 할 말이 없다고 했고, 나는 웃으면서 행복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나와 A는 여전히 친하고 우리 둘 다 너를 10년 동안 언급하지 않은 게 참 신기하다. 아니 전화해서 그따위로 대답했는데 뭐가 신기하냐고? 맞아 내가 너를 버렸나 보다. 나는 더 이상 신세한탄이나 절망만 논하기보다는 뭐라도 발버둥이라도 있는 힘껏 쳐보기로 했다.


나는 10년 전에 S와 함께 불행을 먹고 불행을 뱉는 알고리즘을 끊어내었다. 그냥 불행을 갖고 있는 힘껏 살아보기로 했다.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비웃기보다는, 나는 그들처럼 잘 살 순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계속 끌어내리는 것만은 그만두기로 했다. 잘 살고 싶었고, 오래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는 것을 넘어서 입만 열면 자신의 불행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S 말고도 많았다. 그들의 조건은 한때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내가 부러워했고 부러워하고 부러워할지도 모르는 멋진 것들이다. 뭐 표면적인 조건 따위는 본인이 느끼는 불행과 상관없음을 알고 있다. 

나는 불행이 피곤하다. 음, 불행해서 한탄하는 게 피곤하다. 뭐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꽤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게 대화라는 개념이 있어야 이야기를 할 것 아닌가. 충분히 한탄했으면, 그냥 털고 할 일 한다. 눈앞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꽤 바빠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생각이 없다고, 편하게 산다고 이야기를 듣는다. 화도 물론 나지만 딱히 같이 불행을 뱉어내고 싶진 않아서 다시 할 일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어찌어찌 살아왔고, 앞으로도 큰 문제없이 어찌저찌 어이쿠어이쿠하면서 살길 바란다. 결국 함께 뱉어낼 불행이 없어지면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거나 끝이 난다. 그때뿐이어도 좋아, 그땐 전우였으니까. 지금 무엇이 되더라도. 다만 나는 너와 같은 체력이 없어서, 없어져서 같은 곳에 있을 수 없어. 다음에 또 만나자. 웬만하면, 서로 만날 일 없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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