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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17. 2022

오늘이 아니라 디데이가 익숙해서

난 걸음이 빨랐다. 진짜 빨랐다. 정확하게는 서둘렀다. 보통 내가 걸을 때는 목적지가 있고 예상 도착 시간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방향을 향해 계속 서둘렀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것도 노동요에 가까웠지, 즐겁게 걷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을 사는게 너무 어색하다.

어렸을때부터 그랬다. 하나의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만을 향해 살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오늘은 3월 16일이 아니라 어떤 사건 디데이 4일. 이렇게 정의가 되어 있었다. 소풍이었고 친적 모임이었다. 그래서 항상 그런 일 전날에는 잠을 못 이루었다. 예전에는 그게 설레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냥 허무감이었다. 그 날 밤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어린이날이었던가, 예전부터 손꼽았던 날이었는데 그게 내일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이 날이 지나가면 나는 또 무엇을 세어야하지?

그런 나에게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는 굉장히 잘 맞았다. 계속 주어지는 퀘스트가 있다. 그냥 다들 그 목적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간다. 물론 내가 좋은 성과를 얻은 건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다들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거나 높은 성적을 받는데 디폴트니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계속 발전해야만 했다. 그 방향으로.


그 핑계로 삶과 관련된 과제들을 전부 미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취준생이니까 봐줬고 일단 직업을 구해야하니까 다른 일들은 그 우선순위를 나도 타인도 미뤄줬었다.

삶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니, 엉망이 된 주변이 보였다. 나는 항상 시험기간에 방이 엉망이 되었다. 시험 끝나고 치우지 뭐, 하지만 시험도 항상 그닥 잘 치지 못했고 일단락을 맺고 나면 그 어지러진 공간을 다시 치우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래서 며칠 몇달이고 미뤄놓으며 그냥 엉망 그 자체로 살았다.


항상 이래왔던 나였다.

인간관계 건강 생활습관 경제적 관념 그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 취직을 위하느라 퇴보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나 멍청한 사람이었나? 그래서 대학생 때 적응을 못 하고 반수를 했었구나. 수능이라는 목표가 사라지고 난 후에, 나는 반수라는 목표를 또 하나 설정을 했다. 달려나갈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너무나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다들 마라톤이라는데 혼자 전력 단거리 달리기를 해온 셈이다.


그러면 나에게 두가지 선택지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계속 발전해나갈 목표를 설정하기. 혹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두번째 선택을 해야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처럼 달려나가는데 익숙해지다보니, 나는 자주 그것만이 전부라는 착각을 한다. 그래서 나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엉망이 되어도 애써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나 그 목표 이루면 돼.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한걸.

제일 중요할뿐이지, 그것만 있는게 아닌데도.


어쩌면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00만 이루면 해결될거야. 다른 문제들까지 함께 보면 내 앞날이 너무 불안해지고 무서우니까 괜히 한 방향을 설정했나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어. 그 모든 요소들은 다 나를 이루고 있고, 친구 가족 미래 저축 건강 습관 영양 햇빛 커피 모두가 내 삶을 이루고 있다.

어차피 살아간다면,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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