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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24. 2022

약이 반알로 줄었다.

4년만에 양이 돌아왔다.

먹는 약이 반알이 되었다.

처음 진료를 받았을 때도 반알이었다.

돌아오는데 4년이 걸린 셈이다.


정신건강의학과로 도망가기 전에는 심리상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지 않는 대학생 입장에서는 사회적으로 ‘유난히 멀쩡하지 않아서’ 들어가는 돈이 부담이었다. 그건 곧 나는 정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머니와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상담을 받고 어쩌구는  재미없는 이야기니까 대충 넘어가겠다.

내가 앞에 ‘돌아왔다 표현을 써서 ‘정상이 되었구나!’라는 뉘앙스가 보일까봐 두렵다. 나는 딱히 빙의하지 않았고 구마나 퇴마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도, 정상인 나로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냥 꾸준히 먹던 약이 상태에 따라 양이 많아졌다가 적어졌을뿐이다. 어떤 약이든 복용량이 줄어들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것은 좋은 소식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내가 유명한 가영이 밈처럼 안녕히계세요여러분저는 어쩌구저쩌구를 집어치우고 떠납니다~라면서 삶에 많은 우울과 도움이 필요없는 해피인간이 될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필요하면 적절한 도움을 청할 것이다. 이 약을 줄일려고 딱히 노력한 건 아니다. 나는 크고 작은 안 좋은 일들이 있었고, 분명히 나 자신을 통째로 휘두를만한 일들도 있었다.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딱히 무언가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빌어먹게도 세상이 끝나거나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아서였다.

지금까지 무언가가 끝나면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거나, 인생이 펴질 것이라고 착각해왔지만 정말 착각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단계를 거쳐도 삶은 지속되기에  단계와 비슷한 일들이  펼쳐지고 만다.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약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앞으로  약을 먹을 일이 없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4 전의 나의 상태와 지금의 상태는 비교할  없는게 사실이다. 나는 이제 친구들과  방을 쓰지만 귀마개가 없이도  잔다. 자취를 해도  자고 귀마개를 껴도 선잠을 잤던 나는, 이제 방에 친구들이 들어와도 깨지 않는다. 좋은 일보단  좋은 일들이 훨씬 많지만, 딱히 오래 머무르지도 않는다. 여전히 인기가 없어서 일주일에 약속 한번 잡힐까말까하고, 부족한 점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혼자서 칵테일을 마시며 글을 쓰기도 한다. 여전히 카페에서 혼자 노는 것도 좋아한다. 출근이 아니었으면 아마 전시도 애매한 시간에 많이 보러 갔을 것이다.

언제든  고꾸라지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상태를 겪을 지도 모른다.

내 삶을 살아가는데 걸린 지금의 4년보다 훨씬 더 걸릴까봐 무섭기도 하다.


이제 나더러 시니어가 되라고 조언을 해 준 분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살아가면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 한심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그 순간들을 지금처럼 잘 겪어내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비단 커리어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곡선을 걷게될지는 모르겠다. 억울하게 하향인 순간에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4년동안의 수많은 그 절망들과 유난하게 난리 피웠던 나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리고 앞으로 걷게 될 것들도. 기대하는 능력이 없어서 슬프다. 하지만 또 이렇게 걸어갈 뿐이다.


아직 약 봉지의 무게가 익숙하지 않다. 이 약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동안 걸어오면서 모든걸 포기하지 않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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