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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라는 말을 붙이면 마법같이 그 일이 일어난다.

당신의 '역시, 그럴줄 알았어'는 무엇인가요?

by chul

ktx를 추석 당일 새벽 5시 40분차를 겨우 잡은 나는 새벽 5시에 도로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당일이기에 차가 막힐 생각은 했지만 택시가 안 잡힐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택시를 타면 10분만에 역으로 간다. 하지만 어플을 여러개 시도해보아도 택시가 없었다. 그렇게 기차 출발 25분전,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운이나 타이밍 하나는 x나게 좋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버스를 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버스 말이다. 그 빙글빙글 돌아가는 곳이 오히려 차가 없었다. 8분 전, 늘 지하철만 타는 나는 불꺼진 서울역 근처 버스장에서 10초정도 망설였다. 어딜가야하는거야? 그냥 냅다 감이 잡히는 곳으로 뛰었다. 기차에 올라타서 좌석에 가방을 착지한 순간, 기차 문이 닫혔다. 40분. 역시 나는,

"와, 역시 나야."


운 하나는 기가 막히다.

갑자기 주절주절 왜 추석 이야기를 했냐면, 내가 운을 자랑하기 위함이 맞기도 하다. 그러나, 늘 생각하는대로 되었다는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었다. 와, 이건 진짜다. 그래서 내가 왜 이지경이냐면, 나는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괜히 긍정적인 사람이 재수없는게 아니다. 진짜 긍정적인 사람, 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당시엔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려서 재수없었다. 잘 보면 긍정적이라서 하는 일이 잘 풀리고, 그래서 더 긍정적이게 된다는 선순환을 하는 진짜 재수없는 친구였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현실적이게 되어지지만 여전히 긍정적이고 잘 되어가는 그 친구. 재수없게 잘나가는 친구와 늘 재수없던 나, 항상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한다

나는 수습기간을 지내고 있다. 인턴에 전환이 못 되었던 경험이 있다보니, 늘 불안했다. 자신감이 없어지면 더 자신감이 없는 일이 생겼다. 지금은 겉으로는 자신감이 없고 기가 죽은 상태를 내뿜지만 속으로는 '흐미 지송합니다~'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때는 스스로가 정말 쓰레기같았다. 이번 수습을 잘 못 지낸다면 다신 구직을 할 수 없을것만 같았다. 기업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아가 될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같이 일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때, 침착해졌다. 만약 내가 수습이기때문에 내 고용문제에 협박을 가하는 의도의 말이라면, 그런 말을 일삼는 회사라면, 더 있고싶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믿었다. 어디서든 나는 내 할 일을 다할 것이라고. 아침에 운동을 하려고 늘 고군분투하고(못하지만) 커피라도 한잔하며 쉬려고 하고, 눈 앞의 일(일이든 오픽이든 자소서 작성이든)을 하면, 뭐라도 하고 있을거라고. 믿으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그게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다시 떠올랐을 뿐이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삶은 내 편이다.

아직 수습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불안감은 없다. 내가 선택해서 여기에서 끝장을 한번 봐보기로 했다.

나는 어떤 삶이든 내 편일것이라 믿는다. 내가 살아가는 삶은 내 편이라 믿는다. 아직 부족한게 많아서 일도 잘 못하고, 여전히 세워져서 모두 앞에서 혼난다. 100일동안 미쳐보다던 각오는 온데간데없이 블로그, 브런치를 안 쓴지도 몇 주 째. 늘 야근을 하고 제일 일찍와도 일이 미뤄져서 혼나고 있다. 우선순위를 세워도 새로운 일이 주어지면 우왕좌왕하다가 하루가 간다. 누군가는 나를 비꼬고 누군가는 나를 배척한다. 그 사이에서 가장 어리기 때문에 뭣도 모르고 늘 '혼남'이라는 핑계로 별 욕을 듣고 있다. 그럴때마다 당장이라도 다 나오고 싶다.

하지만 다시 태연한 얼굴로, 늘 했듯이 글쓰고 그림그리고 일하고 운동해야지. 삶에 그냥 내맡겨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냥 눈 꼭 감고, 내 삶의 운을 믿으며 버스를 타던 추석의 새벽. 그 버스가 누구보다 나를 알맞게 추석 기차에 데려다주고 기차는 바로 나를 가족에게 데려다주었던. 일단 나를 믿고 삶에 기꺼이 과감하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척을 하면서 태연하게 살아가던 그 순간처럼 살아야지.

역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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