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내 편 하나는 만들어야지.
가끔 엄마 혹은 아빠가 내 브런치를 찾아보는 것으로 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린 마음에 구독자수가 늘거나 좋은 댓글이 달렸을때 아마 한번 지나가듯 자랑을 해서 닉네임과 플랫폼을 기억하고 계실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것을 기대하고 공유했다.
비단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동료들에게도 쓸데없이 공유했다. 공유해서 공감을 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말할거리가 없어서 지껄이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간과했었다. 모두가 결국 자기 자신의 편이고 온전한 내 편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걸 정말 잘 알고 있어야했다.
왜냐면 나는 내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 내 편이 되려고 노력하고는 있다.
곧 이사를 하는데 이삿날에 부모님이 서울로 오신다. 도와주러? 아니 거진 8년동안 내 이사를 도운적은 없다. 지방에서 차를 몰고 서울까지 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정말 불변의 법칙인 양 믿었다. 내 친구들이 모두 지방에 사는데 부모님이 차를 끌고 오거나 이삿짐을 같이 싸주는 것을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럴때 그 뭐냐 지구 둥근다고 말했다가 재판장에 잡혀간 갈릴레오가 생각난다. 나는 갈릴레오인줄 알았는데 그더러 지구 둥글다고 했다고 디져라,고 한 틀린 사람이었다.
그렇다. 이해한다. 엄마는 엄마편이니까. 딸이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고, 자신을 위해 이사를 혼자 한 밤에도 와서 저녁밥을 먹어주고 다음날 기본 야근 2시간인 직장으로 가더라도 내 편이 아니었다. 내가 코피를 최근에 쏟았고 직장에서 창백하다는 농담을 받으며 사람들이 비타민을 챙겨주는 이야기를 들어도 엄마는 내가 퇴근 이후에 야식을 먹어서 살이 찔까봐 걱정했다.
엄마는 회사에서 내가 실수한 이야기를 들으면 '너는 너무 남들에게 잘 보일려고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고 한다. 그게 내 회사생활을 관통하는 말이긴 하다.
엄마가 관통하지 못한 것은 하나다. 그건 시험기간에 친척집에 끌려가서 틈새 공부를 하던 첫째에게 '남들 앞에서 공부하면 남들이 너 공부 잘한다고 생각한다.'며 실제로 공부를 못하면 화를 낼꺼면서 남들에게 공부 잘한다는 껀덕지를 줄까봐 교과서를 덮어버리던 40대의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나는, 본론보다 서론을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럭셔리하게 표현했는데 그냥 핑계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회사생활이 힘들었고, 다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며 나는 왜 그들이 내 본론까지 기다리지 않는지 의아했다. 지금은 안다. 본론이 대부분 '모르겠다 / 잘 못 했다.'이기 때문에 서론을 내가 너무 길게 잡았기 때문임을.
이제는 내 편이 되려고.
모두가 나의 적인것만 같을때, 나는 내 편이 되려고 한다.
진정한 내 편이 된 순간, 나는 기꺼이 당당하게 안 좋은 본론부터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모른다고. 확인해봐야한다고. 왜냐면 나는 내 편이고 그로 인해서 혼나거나 한심하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나는 내 편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의 지적은 충분히 들었다. 내 편이 없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았다. 그럼 나도 그들과 똑같이 살아보자. 내 편이 되어서 이 뭐같은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가자. 살아남는건 이제 지쳤다.
지적이 난무한 자리는 감히 피해보고, 지적을 들으면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적용하고, 너무 깊게 생각하거나 배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00해야지, 이런 식으로 끝나면 일기라는데. 에세이가 아니라 평생 일기만 쓰다 인생 끝날 판이다. 일기라도 꾸준히 쓰면 내 인생작품(내 인생이 들어가있단 뜻임)이 되겠지. 그래서 오늘도, 나를 위해서 내가 즐거워서, 건강해지고 싶어서 줌바 댄스로 흔들어보려고 한다.
모두가 다이어트를 하라고 할 때, 나만은 나를 복돋아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