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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아가기 - 멘붕와도 할 일 하는 어른이 되어

뭐라도 하자, 나이는 헛먹지 않았다.

by chul

나는 멘탈이 쓸데없이 강하고 쓸데없이 약하다. 강강약약이라고 해야할까. 진짜 많은게 달린 순간에서는 히어로물 주인공마냥 여유롭고 침착해지곤 하는데 별 거 아닌 순간에서는 갑자기 무너진다.


첫 멘탈붕괴-요즘 멘붕이라고 다 줄여말한지 10여년 된 것 같은데 풀네임을 아는 사람이 있긴 한가?-였던 날을 기억한다. 그 이후로 나는 비슷한 순간에 비슷하게 멘붕이란 것을 겪고 많은것을 망쳐왔다.


그날은, 그냥 수학 시험 시간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갑자기 한 문제가 막혔다. 그럼 다음 문제로 얼른 넘어가서 풀고, 시간 남으면 돌아오면 되는데 그게 안 되었다. 다음 문제를 풀면서도 계속 그 문제가 생각이 났다. 그 문제를 못 푸느라 지금 문제도 못 풀면 시험을 망칠것이고 그러면 나를 향해 실망스러운 얼굴을 할 사람들이 떠올랐다. 더 나아가 대학도 못 갈 것 같았다. 그 순간의 시야가 생각난다.

시험지만 보였다. 문제는 안 보였다. 눈 앞이 하얘졌다. 점멸하듯이.


결국 나는 두번째 수능때까지 이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냥 사춘기라서 그랬던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 이후에는 수능처럼 1초를 다투는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착각이었다. 비슷한 상황은 항상 닥쳐왔고 그때마다 또 눈 앞이, 머릿속이 점멸했다. 면접일때도 있었고 인적성 시험일때도 있었고, 입사 이후 누군가에게 이슈를 보고하거나 처리해야할 때도 그랬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사람들과 일을 못 할 것 같을때, 꽤 친했던 친구에게 심한말과 함께 손절(?) 통보를 들었고 화장실에서 숨을 참았다. 그때 겨우 알았다.


시x, 나 10년전이랑 달라진게 없잖아.

그때 수학문제 못 풀던때랑 뭐가 다른거야? 그때도 눈 앞의 문제는 못 풀고 이전에 못 푼 문제, 망친 시험, 앞으로 망칠 시험, 사람들의 비난 등을 상상했잖아.


하지만 확실한게 있었다. 나는 철없던 학생이 아니었다. 이젠 한 사람 몫을 하려고 하는 초보 사회인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돌아갔다.


눈 앞의 일을 하자.

과거도, 미래도, 나중에 생각하자.


그러면서 토할것 같고 숨은 여전히 못 쉬었지만 눈앞의 일을 했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태연한 척을 하면서 유관 부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요청할 것을 요청하고, 협의할 것을 협의했다. 여전히 숨은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전혀 침착하지 않은 상태로) 해냈고, 퇴근 전에 오늘 한 일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사람이 멘붕이 와도 할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이 꺾여도 할 일을 해내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좋은 결과는 아니어도 아무것도 못 한 것보다는 뭐라도 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 문장 쓰면서 내가 '것'이라는 이상한 표현도 겁나 많이 쓴다는 사실도 새삼 알고있다.


그렇게 나는 계속 멘붕을 하고 자주 숨이 막힌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할 일을 해댔다. 나의 업무 보고에는 결과가 쌓였다. 결론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10년동안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네. 그렇게 퇴근을 하면서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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