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놓은 아이, 펜을 든 어른이 되다”
내가 유치원을 다닌 건, 집안 역사상 꽤 자랑할 일이었다. 오빠는 그걸 늘 부러워했다. 지금처럼 누구나 다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유치원은 그때만 해도 꽤 근사한 곳이었고, 어쩌다 운 좋게 정부 지원으로 동네 교회에 새마을 유치원이 생기면서, 나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전문성’보다는 ‘열정’이 더 앞섰던 현장이었다. 뭐랄까, 교사 자격증보다는 자원봉사 정신이 먼저였던 시절. 하지만 내 인생의 그림은 거기서부터 살짝, 아니 은근히 크게 비틀어졌다.
내가 유치원에서 참새 같다는 명명으로 평생 이름을 싫어하게 해준 선생님이 또 한 번 나의 인생에 큰 획을 그었다. (그분 참 누구인지 찾고 싶네….) 그날은 유치원 상·하반기 통합 생일잔치 날이었다. 엄마들이 직접 음식을 해 오고, 교실은 풍선과 색종이로 가득 꾸며졌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복도 벽과 교실 구석구석에 전시했다. 무대 정면에 아이들 작품이 줄지어 걸렸고, 나는 기대감에 벅차올랐다. ‘엄마가 내 그림을 보면 뭐라고 할까?’ 설렘 반, 뿌듯함 반이었다. 하지만 내 그림은 정면이 아닌 가장 끝, 기둥 옆 꺾인 모서리에 조심스레(?) 꺾여 있었다. 칠해진 색감은 이미 바래 있었고, 테이프 한 귀퉁이는 떨어져 있었으며, 다른 그림들과의 간격도 묘하게 멀었다. 내 그림만, 따로였다. 기억이 또렷하다. 그 그림을 그릴 때,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왜 나무를 그런 색으로 칠하니?”“다른 색으로 바꿔봐 이쁘게.”
나는 처음엔 신나게 그렸지만, 계속된 타박에 점점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선생님이 내 그림을 부끄러워했구나." 그 순간 나는 그림을 부끄러워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 사건은 나도 모르게 내 자존감의 캔버스를 어지럽혔다. 엄마는 그날 내 그림을 보셨을까? 기억이 없다. 남은 건 단 하나의 감정. 부끄러움. 그 감정이 내게 이런 말을 속삭였다. “넌 그림을 못 그리는 아이야.”
그 믿음은 그대로 초등학교로 따라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미술 시간은 늘 숨고 싶은 시간이었다. 당시는 한 반에 60명.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존중이 그렇게 크게 반영되지 않던 그 시절. 준비물을 안 챙긴 아이는 미술 수업에서 배제되었다. 선생님은 단호했다. "준비물 안 가져온 친구들은 뒤에 가서 서 있어!" 나는 그걸 기회로 삼았다. 매번 미술 시간만 되면 일부러 크레파스를 두고 오고, 도화지를 잊은 척하며 뒤에 서 있었다. 친구들이 말렸다. “뒤에 서 있는 거 창피하지 않아?” 하지만 내게는 크레파스를 드는 창피보다, 서 있는 부끄러움이 훨씬 덜했다. 누가 보면 벌을 받는 줄 알았겠지만, 그 서 있는 시간은 내게 작은 피난처였다. 그렇게 미술을 피하며 자랐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아예 다른 세상 사람처럼 여겼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어, 나는 다시 손으로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다. 옷들을 잘라 변형해 입고, 티셔츠에 패치를 붙이고, 가방을 리폼하는 재미에 빠졌다. 사람들이 “너 디자이너 하면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미술 못 해. 그림 못 그려.” 그 한마디로 가능성의 문을 닫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억울하다. 그때 선생님이 “이 나무색, 참 따뜻하네”라고 한마디만 해줬다면, 디자인이라는 진로 앞에서, “난 미술 못 해”라며 문을 닫지는 않았을지도.
오빠는 아직도 말한다. “그래도 넌 유치원 다녔잖아.” 맞다, 나는 유치원 다녔고, 거기서 미술을 놓았고, 그 뒤로 한 번도 붓을 잡지 않았다. 그러니 오빠야, 다음 생엔 네가 유치원 가고, 나는 그림 그릴게. 그래도 뭐, 그 덕에 나는 지금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른이 되었고, 붓 대신 펜을 들고 글을 쓰고 있으니까 또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인생은 어디서 뭘 잃고 뭘 얻는지, 그때는 잘 모른다. 그러니 그 시절 내 그림이 무대 정면이 아니라 기둥 옆 꺾인 자리에 붙어 있었던 것도 알고 보니, 내 인생의 새옹지마 1호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