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마 엄마>>결핍은 창의력을 입는다

by 쫄지마

반짝임에 빠진 소녀


어릴 적 나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다. 귀걸이, 목걸이, 스카프, 화려한 원피스. 지금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결정되었다. 그 결정에는 한 사람이 강하게 영향을 끼쳤다.


시골 교회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선생님. 작은 예배당의 진정한 디바였다. 지휘봉을 흔들 때마다 귀걸이가 반짝이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찰랑일 때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나에게 그분은 노래보다 무대였고, 반짝이는 귀걸이 하나에도, 드레스의 자락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곧바로 현실 가능한 목표로 번졌다.

‘제일 먼저 귀걸이를 사러 갈 거야.’


통장과 꿈 사이


그렇게 다짐했던 소녀는 곧 알게 되었다. 꿈과 통장 사이엔 넘기 힘든 계곡이 있었다. 우리 집엔 내가 원하는 패션을 실현해줄 여유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옷’을 입었다. 엄마가 지인에게 받아온 옷더미 속에서 패션의 가능성을 캐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이건 그냥 입는 게 아니야. 이건 나의 무대 의상이야."


청바지엔 표백제를 뿌려 ‘의도된 물 빠짐’을 연출했고, 티셔츠는 밤새 가위질해 어깨를 찢고 소매를 묶었다. 하나의 옷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겹겹이 쌓아 입었다. 수련회 단체복도 그냥 입는 법은 없었다. 오리고 붙이고, 밤을 태워야 진정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마무리는 늘 굴러다니던 스카프. 한쪽은 리본처럼, 한쪽은 베레모처럼. 시골 소녀의 가보지도 못한 파리 감성은 그렇게 탄생했다.


엄마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집사님답지 않게 딱 한마디만 했다.

“너 완전 거지 패션이다.”


그 말이 나를 얼마나 들뜨게 했는지 모른다. 그건 허락이었다. 내가 나를 표현해도 된다는 조용한 응원.


유전되는 거지 패션


그리고 지금, 내 딸은 그 시절의 나와 똑 닮은 ‘거지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옷을 치밀하게 겹치고, 일부러 한쪽을 삐져나오게 만들고, 오빠의 옷을 즐겨 입으며 오버핏의 진가를 보여준다.


딸에게 오빠 옷을 물려 입혔던 ‘의도적 결핍’을 제공한 엄마가 있었기에, 지금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이다. (물론 딸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 집의 거지 패션은 세습된다.)


나는 지금도 패션 하나만큼은 어디서든 인정받는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웃는다.

‘내 손에서 태어난 거지 패션이 이렇게 환골탈태하는구나.’


결핍은 무대를 만든다


결핍은 때로 무대를 만든다. 누군가는 결핍에 눌리고, 누군가는 그 위에 깃털을 얹는다. 나는 다행히 두 번째였다.


물론, 아이의 부족함을 메워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일찍 채워진 욕구가 아이의 성장을 멈춰 세우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적절한 욕구의 지연은 동기가 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꼭 필요한 자극이 된다고.


결핍은 창의성의 씨앗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결핍’은 오해하지 말자. 정서적 결핍은 창의성의 연료가 아니라, 성장을 망가뜨리는 스크래치다. 아이의 마음은 사랑과 공감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외부의 부족함이 아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에너지로 바뀐다.


너무 편한 아이는 불편함을 모른다. 너무 다 가진 아이는 원함이 없다. 부족함이 없으면, 만들고 싶은 것도 없다.


그러니 아이가 느끼는 작은 불편함을 너무 빠르게 해결해주기보다는, 그 틈에서 생겨나는 궁금증과 상상력의 발화를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인생을 디자인한다.


그러니까, 결핍을 두려워하지 말자. 어쩌면 지금 우리 집 거지 패션 아이콘도, 언젠가 프라다보다 더 멋진 무언가를 창조해낼지 모른다.

(표백제는 안 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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