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나는 종종 새벽어둠 속을 걷는 순례자들을 보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손에 든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두세 시간의 어둠을 가르며 걷는 이들. 덜 더운 시간대를 노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도착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멋지다. 목적지를 향한 열정과 단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걷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마을이 깨어나는 시간에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하루를 천천히 시작했다. 길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 움직이는 그림자, 뜨거운 햇살에 뺨이 데일 듯한 순간들도 고스란히 지나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많이 느꼈다. 나는 그 과정을 걷고 있었고, 그 길이 나에게 목적만큼이나 소중했다.
목적지에 어떻게 도착하느냐는 각자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누군가는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보며 걸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가는가'이지, '얼마나 빨리 도착했는가'가 아니다.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삶의 속도는 정답이 없다.
아이들을 떠올린다. 누구보다 빨리 출발하느라 지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 어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너무 이른 출발이 꼭 더 좋은 도착지를 보장하진 않는다. 유아기의 느린 하루하루가, 실은 그 어떤 조기 교육보다 깊은 성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유아기의 천천한 하루하루, 장난감으로 노는 시간, 흙을 만지고 바람을 느끼는 시간이 실은 진짜 배움의 시간일지 모른다. 너무 일찍 출발하느라 이 귀한 것들을 놓쳐버리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빨리 도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건, 대학 가서 멍해진 아이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빠르게 도착한 아이는 정작 목적지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대학이라는 이름의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하고 허둥대는 청춘들을 수도 없이 본다. 반면, 느리게 걸은 아이는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다른 길로 향할 수도 있고,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을을 만나 목적지를 유연하게 바꿀 수도 있다. 체력이 붙은 시점에서는 누구보다 멀리 나아갈 수도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다.
빠르게 간다고 해서 깊이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아이가,
비로소 '왜 걷는가'를 알고 '어디로 가는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뜨고,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 나는 알았다.
내가 걸은 길이 목적지만큼이나 소중했다는 걸.
오늘도 나는 느긋하게, 그러나 분명히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