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지] 오늘과 내일의 해방교육을 위해

Paulo Freire

by Ruddyd Als

하나의 책은 그 책을 지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다. 환경이 인간을 낳고 그 인간이 책을 만든다는 것이다. Paulo Freire의 『Pedagogy of the Oppressed』, 한국어판으로는 『페다고지』로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저자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Paulo Freire는 1921년 브라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대공황 시기를 지나면서 빈곤과 기아를 경험하면서부터 빈민 문제와 대중교육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간이 가지가 되는 빈곤과 기아, 문맹은 필연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이때부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눈을 뜨면서부터 해방 교육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피지배계층이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및 방법, 여정을 소개한 책이 바로 『페다고지』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프락시스(Praxis)는 실천으로 번역이 가능한 프랙티스(Practice)와 어원이 같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프락시스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강조하고 있다. 바로 말과 실천이 일치되는 즉 사고와 행동의 총합이 바로 프락시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고가 없고 무조건적인 행동만 존재하는 행동주의도 아니고 행동이 없고 말만 무성한 탁상공론도 아니다. 실천적 성찰과 성찰적 실천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저자가 수차례 강조하는 프락시스인 것이다.


교육분야에서 많이 읽히고 있는 『페다고지』는 지금까지의 교육이 은행 저금식 교육이었다면서 비판을 한다. 교사는 지배적인 위치에서 학생들에게 기계적으로 암기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학생들을 교사가 내용물을 ‘주입’하는 ‘그릇’이나 ‘용기’로 만든다고 말하면서 그 그릇을 더 많이 채워지게 하는 교사는 유능한 교사로 더 많이 채워진 그릇 즉 학생은 똑똑한 학생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는 당연히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순하고 관리가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더 많이 저금을 함으로써 인간은 비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피지배계층으로(물질적, 정신적인 구분을 떠나) 남아있게 된다. 무서운 것은 억압자 즉 지배계층이 피억압자 즉 피지배계층을 억압하는 상황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피억업자의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에 있다. 의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낳고 그것은 억압자들이 바라는 바람직한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를 끊기 위해 저자는 문제제기식 교육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을 인식의 대상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 조건이 무엇일까. 바로 ‘대화’이다.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겸손, 인류에 대한 신념, 희망, 비판적 사고 등이다. 오만한 대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낳고, 인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인간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낳는다. 희망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재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없다면 이 역시 현재 상태의 머무름에 안주하여 인간의 진보적 생성은 일어날 수 없다.


책을 읽다 보면 8,90년대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저자가 살던 시기와 환경 그리고 살아온 삶은 지배를 벗어나서 피지배계층과 함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행동으로 점철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억압되고 억눌리던 시기에 『페다고지』가 읽히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에는 분명 억압과 피억압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피억압 계층을 의식화하여 해방시키는데 지도부가 힘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어휘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왜 지금 『페다고지』를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의 뒷부분에 부산교대 심성보 교수가 이에 관해 쓴 글을 보고서 이해가 되었다. 심성보 교수는 현재 억압이라는 말이 잘 보이지 않는 현대, 즉 한국에서 억압이 진정으로 사라졌는지 반문해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억압이 사라졌다면 응당 누려야 할 자유가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가. 특히 교육에서 자유는 보장을 받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초, 중, 고는 말할 것도 없고 학문의 자유가 있다고 여겨지는 대학에서도 억압이 사라졌는가? 이것은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억압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에 관해서 저자가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저자가 말한 언어의 명료함에 대한 요구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문제라는 것이다. 언어의 명료함 뿐만 아니라 언어의 존재는 이데올로기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대중들에게는 민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민중이라고 하면 뭔가 사회주의적인 냄새가 짙고 투쟁, 선동, 쟁취라는 과격한 단어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의식적으로 대중매체들은 이러한 단어를 배제함으로써 대중들을 의식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억압이라는 단어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재 형식적으로나 절차적으로 민주화된 사회를 살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은 실질적 정당성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고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우리는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포장된 사회 현상의 이면에는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가. 뭔가 교묘한 술수로 우리를 안내함으로써 우리를 무의식의 존재로 전락시키지는 않는가.


인간은 단순히 두 개의 계층 즉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구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고 영속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즉자적 존재인 동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대자적 존재인 인간은 자유를 누려야 하고 억압자들이 사용하는 술수인 분할, 문화침략, 정복, 조작 등의 방법을 잘 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말한 대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비해 많이 자유롭고 평등한 위치에 있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교사가 될 우리들은 학생들과 함께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할지 시사할 점이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에게는 유용한 책이지만 교사에게는 학생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책이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이 또한 깨부수어야 할 사고의 틀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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