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3] 실재를 뛰어넘은 가상의 현실로

진중권

by Ruddyd Als

19세기에 제작된 카메라 옵스큐라는 예술 특히 회화에 있어서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하는 기계장치였다. 존재하는 대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에 중점을 뒀던 지금까지의 회화 경향은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해 그 존재의 가치를 위협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이 카메라의 등장은 곧이어 사진의 연속적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를 탄생시켰고 이것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연극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하였다. 이런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보수주의자들은 반감을 가졌지만 벤야민 같은 진보주의 예술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적극 환영했다. 그들은 기술의 출현에 따른 새로운 생산력의 등장은 낡은 생산체계를 무너뜨려서 예술에 관한 새로운 관념의 탄생과 인간 상상력의 해방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인류는 진화하지는 못했다. 벤야민이 그렇게 환영했던 기술, 이를테면 텔레비전은 인간을 멍청한 사고만 하는 바보상자로 전략했고 영화는 화려하게 돌아가는 사진으로 인해서 인간의 정신을 혼란한 상태에 빠지게 했다. 벤야민이 말했던 비판적 인간의 양성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것은 미디어학자인 맥클루언이 말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며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강화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배반한 것이다. 맥클루언과 반대로 안더스는 인간은 미디어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사진과 영화는 복제의 산물이다. 사진은 필름을 인화한 사진을 무한대로 양산해낼 수 있다. 영화 또한 전국에서 상영되는 영화 필름에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본없는 복제를 ‘시뮬라르크’라고 일찍이 보들레야르는 말했다. 이것은 인간들이 예술을 통해서 이룩하고자 했던 숭고 즉 아우라를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왜냐하면 숭고는 단 하나의 원본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하나밖에 없다. 인간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모나리자를 볼 때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모나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억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니리자가 어느 국가에나 어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다면 우리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집에 들어가서 드라마를 볼 때 아우라를 느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숭고가 사라진 현대미술에서 복제품은 이제 다른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바로 해석이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대량생산품을 예술작품의 위치로 점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해석이다. 여기에서는 모종의 모의가 존재한다.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게 하는 것 즉 가치 있는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특히 평론가가 지껄이는 말과 그것을 추종하는 수집가나 대중에 의해서 창조된다.


미학오디세이 3에서 강조되는 말은 모방, 복제, 원본, 유사 등등의 어휘다. 우리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존재하는 것은 카메라와 카메라가 담은 사진이나 영상들이다. 진짜를 보기보다는 프레임에 담긴 현상만을 볼뿐이다. 그 프레임에 담긴 현상은 편집자의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레임에 담긴 메시지를 대중들은 수용한다. 이를테면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상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것을 막기 위해 현실이 가상세계에 들어서는 것을 막는다. 가장 친근한 예로서 영화 트루먼 쇼를 들 수 있다. 극 중 주인공은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때때로 현실의 사건들이 가상의 세계에 침투한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를 만든 인간들은 침투하는 가상의 세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시뮬라르크 즉 가상세계의 질료들은 시뮬라시옹 즉 그 질료들이 판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장소에서 인간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가상의 세계는 이미 현실세계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감각을 현혹시킨다. 오죽하면 하이퍼 리얼리티라는 예술사조가 생겨났겠는가. 사실을 뛰어넘은 사물, 진중권은 이 단어를 극사실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사실의 극한이 아니라 사실과 복제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사진으로 회화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로 사진을 흉내 내는 것이다.


동굴 속에 갇혀서 사물의 진본은 보지 못한 채 그림자만 평생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원본의 사본의 사본을 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어디에서나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사본의 사본을 본뜬 더 나아가 그 사본들이 서로를 복제하는 상품에 둘러싸여서 그것들을 소비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의 복제품들이 무한히 증식할 수 있는 것처럼 먼 미래에 내가 아닌 나를 대신하는 이미지를 가진 어떤 존재가 나타나 세계를 휘젓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망상일까?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3』은 이제 현대의 미술사조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사회에는 이제 사라져 버린 예술적 감성과 그것을 대체한 현대적 감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 즉 가상과 실제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진중권이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쳤던 사회적 사건(책에서는 워터게이트)에 감춰진 이면 및 예술작품의 모방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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