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이 책은 총 10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다시 세부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책 자체는 상당히 두껍고 인내를 요하지만 신과 종교가 없다는 것 혹은 없다면 더 좋다는 것을 나름대로 논증(?)학하고 있다.각 장에서 대표적인, 맛보기 용으로 한 소제목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양이 많지만 약간의 인내를 발휘한다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고 책을 구입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한다.
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 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이 장에서는 ‘종교’라는 이름을 붙이면 모든 만사가 해결되는 다양한 예시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종교’를 모독하는 일은 금기시 되어 있다. 신앙이 모독에 취약하므로 인간을 대할때보다 훨씬 높고 두꺼운 존경의 벽을 쌓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냐고? 그냥 그러면 안되는거다.
종교의 특권에 관한 하나의 예시를 보자. 2006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종교적인 이유로 불법 환각제가 사용될 수 있음을 판결하였다. 그런데 대마초는 의학적인 이유로 암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연방법상 기소 대상으로 판결하였다. 다른 예시를 보면, 2004년 오하이오 주에 거주하는 한 학생은 동성애, 이슬람, 낙태에 관해 비판적인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학내에서 입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책에서는 언론의 자유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에 해당하는 소송이었다면 정당한 판결이었겠지만 그는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으 이유로 호소를 했고 결국 이겼다. 증오가 적힌 사상의 자유라도 그것이 종교적인 것임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증오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혹자는 2006년 2월에 있었던 덴마크의 한 신문이 마호메트를 묘사한 12컷 만화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그 신문사에서는 9컷만 그리고(그것도 마호메트를 모욕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음) 나머지 3컷은 조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그 신문에 관해 비난과 비판의 화살이 돌아갔고 이스람사회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시위(덴마크 국기를 불태우고 덴마크 국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왜 종교와 종교 지도자는 비판의 대상이 되면 안되는가?”, “왜 특권을 누려야만 하는가?”라고.
2. 신 가설 – 불가지론자, 불신자의 또 다른 이름?
이 장에서는 신의 존재에 관해 말하고 있다. 특히, 불가지론자(일반적으로 특정한 명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 – 이 책에서는 신의 존재에 관해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도킨스는 불가지론자 중에서 TAP 범주에 자신이 속한다고 말한다. 즉 이쪽 아니면 저쪽, 신은 있든가 없든가 둘 중에 하나인데 아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정확히 말하면 없다는 쪽에 가까움)는 것이다. 이것에 관한 다음 예시를 보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찻주전자 우화를 들어보자.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찻주전자는 광학줌이 정말로 뛰어난 망원경이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라는 가정을 덧붙여보자. 그렇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그 찻주전자의 존재에 관해 의심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 한다면 그것 ‘헛소리’로 여겨야한다. 그리고 찻주전자의 존재에 관해 옛 서적에 명확이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것을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조차 그것을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괴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며 중세시대였다면 종교 재판을 당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것이 이 ‘찻주전자’의 존재와 같다는 것이다.
찻주전자 뿐만 아니라 다른 예시들, 마더 구스, 스파게티 괴물 등등을 통하여 도킨스는 이 모든 기발한 사례들의 요점은 그것들이 반증불가능한 영역에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아무도 그들의 존재 가설이 그들의 비존재 가설과 대등한 토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의 입증 책임은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있다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쉬우니까.(이것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책 바로 뒷장에 이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이 반증 불가능하냐가 아니라 신의 존재가 개연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3.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 존재론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들
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연역적인 방법과 귀납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연역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이 논증은 1078년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St. Anselmus)가 제시하고 후에 많은 방식으로 개작한 존재론적인 논증이다.
위대한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무신론자라고해도 그런 상상은 할 수 있다. 비록 무신론자는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없다는 것은 없다는 그 사실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모순이므로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한 때 위와 같은 논증에 수긍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내 저 논증의 허점을 간파하였다. 즉 “우리가 그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우라가 생각하는 외부에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라고. 그러면서 도킨스는 현실 세계로부터 얻은 자료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는 모든 추론들에 대해 자동적으로 깊은 회의를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존재론적 논증은 여러 경이로운 증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터무니 없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예시가 있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무원과 승객 대부분이 사망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아이는 3도 화상만 입은 채 살아 남았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이 증명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4.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 인본 원리: 행성편
지구에는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왜, 어떻게 지구에 그렇게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생명의 기원은 어디에서 출발하며 어떻게 생명체들은 그 모습을 바꾸면서 생활해왔는가.
지구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이유는 지구가 태양과 알맞은 거리내에 있다. Goldilocks zone이라고 불리우는 영역에 있기 때문에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 행성이 이렇게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원인으로 도킨스를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설계이론 – 신이 지구를 만들었고 이 좋은 위치에 옮겨놨다-과 인본적 접근 – 생명체가 살기 힘든 행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소수의 행성은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지구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다른 어딘가가 지구처럼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한 행성이 있다는 것 –이다.
생명이 처음에 탄생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 이후에는 자연선택에 의해 생물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선택 이전에 생명이 탄생한 다음에 1차 관문인 진핵생물로의 진화를 통과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우선 생명의 탄생은 우주의 수많은 행성의 수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아직 우주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행성의 수가 얼마인지 가늠이 안되지만 지금까지의 관측결과를 생각하면 대략 알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출현을 아무리 작게 잡더라도 대략 10억 개의 행성에서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도킨스의 생각이다. 즉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종교의 뿌리 – 종교, 다윈주의를 비켜가다?
종교의 뿌리는 무엇이며 인류가 그것을 왜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론과 실증적 증거를 들이댄다.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화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만약에 종교가 인간에게 해로운 점만을 준다면 종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유리한 유전자가 무엇인지 빈틈없이 재고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일종의 회계사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작의 꼬리는 그 화려함 때문에 천적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지만 번식에 있어서 유리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것이 유지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개미 목욕 – 어치 같은 새들은 개미의 둥지에서 ‘목욕’을 하는 것 –이 어치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런 행동이 유지가 되는지는 모른다. 이러저러한 단서나 추정이 있지만 말이다.
진화론자에게 종교는 “햇빛이 드는 숲 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에너지가 많이 들고 자칫하면 종의 보존을 담보하지 못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수많은 살인과 약탈, 집단간의 갈등을 보아 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종교의 혜택은 무엇인가?
다윈이 말한 종교의 혜택에 대한 자연선택은 ‘유전자’ 단위에서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 혜택은 유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그 혜택을 세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다. 첫째는 집단 선택론 – 집단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부족과 갈등이 생겼을 때 목숨을 내놓고 싸우면 내세에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고 둘째는 유전자가 다른 숙주로 옮겨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인간을 조종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종교가 유익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앞서 말한 생물학적 유전자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유전의 단위로서 인간의 삶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을 결속시키는 차원에서 종교는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6.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 – 다윈주의와 도덕의 기원
자연선택이 진화를 추진한다는 다윈주의 개념은 우리가 지닌 선함, 이를테면 도덕, 예의, 감정이입, 연민과 같은 단어들을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느끼며 기꺼이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가? 우리안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서 올까?
다윈주의 논리에서 자연선택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다. 이기적인 종도 아니고 이기적 생태계도 아닌 ‘이기적 유전자’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대상은 ‘유전자’이다. 그것은 생물이나 집단, 종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유전자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자신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족을 선호하도록 프로그램화 된 것과 호혜적 이타주의이다. 전자는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후자이다. 후자는 어떻게 해서 유전자단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바로 공생이라고 불리우는 관계 때문이다. 공생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유전자가 대대손손 이어질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자연세계에서는 어느 한 생물이 이타주의를 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래꼬리치레들은 자신보다 작은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이 출몰했을 때 울음을 통해 그들이 도망하게 할 수 있게 해주고 때로는 먹이를 준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라고. 난 너한테 보초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어.”라는 표현이다. 즉 우위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짝을 유혹하는 등의 성공을 살 수 있다.
인간이 이타주의를 하는 것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무리의 구성원내에서 행했던 것이다. 다른 무리의 구성원들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기꺼이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까운 친족으로 둘러싸인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가? 그 물음에 대해 도킨스는 빗나간 다윈주의적 실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예전의 방식이 그대로 뇌에 남아 있고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 구약성서
자연재해의 원인을 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아 신이 인간을 탐탁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신이 내리는 형벌로 생각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2005년 미국에서 발생한 카트리나 허리케인은 뉴올리언스에 사는 레즈비언 코미디언 때문이라고 어느 복음 전도사가 말을 했다. 종교인,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받은 교육 때문에 그들은 자연재해를 지각판 같은 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의 비행에 대한 응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여성혐오가 나와 있다고 도킨스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보자. 이름모를 레위인(사제)가 첩과 함께 기브아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노인 집에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묵고 있는데 도시 남자들이 몰려와서 그 레위인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노인을 거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그의 첩과 내 딸이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했다. 내 딸과 사제의 첩을 마음껏 욕보이고 강간을 해도 좋으니 남성인 내 손님에게는 적절한 존경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을 하면 좋을까.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말을 한다. 이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글자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미국과 이슬람권에서 그렇다. 둘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어떻게? 도덕적인 교훈으로?
도킨스는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은 경전으로부터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경전에서 도덕을 추출한다면 경전에 있는 내용을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느 것이 도덕적인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에 관한 문제로 바뀐다. 즉 취사선택한 성서 대목을 곧이곧대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기교를 부린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느 대목을 상징적으로, 어떤 대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어떤 사람은 성서에 나온 어떤 인물 – 이를테면 야훼와 같은 –을 삶의 모델로 살아가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 사악한 괴물을 받아 들이라고 강요를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만 불쾌한 내용이 나온다고? 신약성서는?
또한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규율중에 하나인 십계명에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는게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된다면 세계는 광신도들의 천지가 될 것이라고 도킨스는 말하고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 또한 말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정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라고.
8.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 근본주의와 과학
근본주의자가 믿는 것의 원천은 그것이 ‘공리’이기 때문이다. 공리는 추론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만일 증거가 그가 믿는 것과 대치가 된다면 버려야 할 것은 그 믿음이 아니라 증거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믿는 것은 ‘증거’를 바탕으로 한 진리이다.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믿는다. 과학자들이 ‘진리’라는 것의 의미를 어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진리를 반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도킨스는 책에서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도킨스는 근본주의 종교가 수많은 순진하고 선량하고 열의가 있는 젊은이들의 과학 교육을 망치려하고 있다면서 비판적이다.
9. 종교로부터의 도피 – 신체적 학대와 정신적 학대
소아성애자에 대한 군중 히스테리는 유행병 수준에 도달해 있으며 부모들을 공황 상태로 내몰고 있다. 소아성애자들이 어린이에게 행하는 신체적 학대(가톨릭에서는 꽤 오랫동안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는건 주지의 사실이다)와 정신적 학대중에 더 중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정신적 학대라고 도킨스는 말하고 있다. 즉 후자가 훨씬 더 나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화로 영화 감독인 앨프리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한 신부가 어린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린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자 히치콕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달아나, 아이야!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
교사와 사제가 고해성사를 하지 않은 죄인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을 믿도록 아이들을 부추기는 것을 보고 그것이야 말로 ‘아동학대’이다. 어린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무시무시한 말 – 지옥에 간다. - 은 두려움이 그 시절을 지배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에서 벗어나는 걸 많이 힘들어 한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 자신이 성장한 사회 전체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주변 사람에게 말했을 때 맞이하게 될 파국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따라서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털어놓기가 매우 어려워 한다. 이러한 형태는 종교적 양육으로 키워진 아이들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학대이다. 이것은 진정한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10.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 위로
그렇다면 종교와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로, 영감 등등... 여기서는 위로에 대해서 알아보자.
종교가 인간에게 위로를 준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된 것은 아니다. 즉 종교신앙이 진리라는 증거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이 없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감정이냐 진리냐, 둘 다 중요하지만 둘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 보이는 종교인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낙태와 자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종교인들(특히 그 종교인들)은 반대를 한다. 하지만 현세 이면에 내세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한다. 현세에서 쌓은 업이 내세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현세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도킨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 겁을 내고 있으며 두려워하는 인간은 바로 종교인이 아닐까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한 나이 지긋한 간호사의 경험을 듣고서 말이다. 종교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중세시대에는 면죄부를 팔았고 연옥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줄여준다는 핑계로 돈을 받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아내가 없는 삶은 공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는 못한다. 다른 누군가(아이라면 부모, 어른이라면 신)가 당신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준다는 가정은 유치하다. 그것은 발목을 접질렀을 때 고소를 할 사람이 있나 주위를 둘러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 닥친 불행이나 전 지구적인 재해와 재난에 대해 신의 필요성이 배후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며......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선한가?
신은 전지전능한가?
저 세 개의 물음에 모두 “Yes”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종교에 빠진 것이다. 아마 도킨스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잔소리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종교와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종교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책이다.
종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 믿고자 하는 사람, 믿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