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nst Gombrich
국내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이 되어 출간된 『The Story Of Art』는 원제 그대로 번역이 됨이 마땅하다고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협의적 의미에서 미술이 아니라 광의적 의미에서 미술인데 보통 사람들이 미술이라고 하면 회화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광범위한 의미에서 Art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에 이르기까지 예술이라는 것에 포함되는 모든 것(아 음악은 제외하고)이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루고 있는 시기마저 기원전 고대시대, 심지어 원시시대뿐만 아니라 이 책이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후(사실 그 이후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Ernst Hans Gombrich는 책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존재할 뿐이다.”
위 구절은 책의 끝부분에도 등장한다.
소설이라면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고 어떤 저명한 학자의 학설이라면 그의 대표적인 학설을 압축시킬 수도 있다.(그의 주장이 이해가 된다면) 하지만 곰브리치의 저서인 『서양미술사』를 압축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서양의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 연대기 중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인상이 깊은 어느 한 시기의 미술의 사조를 말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 책의 설명이 부족하다. 이 책은 대략적인 서양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는 정도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 실제로 곰브리치는 책의 서문에서 낯선 미술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하는 젊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만만치가 않다. 왜냐하면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에서 중세 이전까지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이후로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그 많은 신들의 이름에 벌써부터 막막) 기독교도가 아닌 나로서는 저자가 설명하는 예술에 대한 설명이 쉽게 와닿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술이라는 것은 예전의 기법이나 사조를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 예술가들은 예술을 배우기 위해 예술의 대가 밑에서 수련을 했다. 스승의 기법을 터득하고 때로는 그 시대에 유행하는 양식(책에서는 manner로 표기)을 습득했다. 하지만 새로운 예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가 필요했다. 고대에서는 스승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러한 것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유는 시대가 달라지고 인간들이 사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국교화 상공업의 발달 및 상업의 진흥은 예술이라는 것이 성직자나 군주의 것에서 탈피하여 일반 시민들도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예술가들이 군주의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렸던 것에서 자신의 그림을 파는 즉 맞춤식 그림 제작에서 예술가의 개성이 드러난 작품을 파는 것으로 변모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의 그림에 서명조차 하지 않아서 누구의 작품인지 몰랐으나 차츰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예술이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새롭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 미술의 거장인 피카소는 그가 그린 인물화에서 사람들은 당황을 한다. 평소 사진 이미지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인물을 볼 때 인물이 가진 모든 회화적인 이미지를 볼 수는 없다. 즉 정면, 측면, 위에서 본모습은 필연적으로 다른 면의 이미지를 소실하게 만든다. 하지만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 인물의 모습 특히 얼굴의 모습이 기괴하다. 얼굴의 모든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피카소의 인물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집트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리고 고대의 벽화를 보면 인물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측면을 고려하였다. 그 유명한 이집트의 연못을 보면 나무, 연못, 물고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나 있다. 또한 고대의 인물을 그린 모습을 보면 피카소의 인물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창안했다고 해서 모두 후세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은 새로운 것을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 동조를 하는(새로운 사조를 만들고 그것에 참여하는 일군의 사람들)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평론가 및 일반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어야 가치를 인정받을까. 불행하게도 이 책을 모두 읽은 뒤에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이 보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예술의 시대에서 현대는 작가의 생각과 개념을 표현하는 시대로 변화하였다. 그대로 그리는 것은 사진기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사진기의 기술을 따라갈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과 예술가의 예술에 대한 시선의 차이가 생겨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중들은 여전히 사실적인 모습에 감탄을 하고 형이상학적 작품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값비싼 가격에 의문을 표시한다. “저런 작품은 나도 만들 수 있겠다.”라고.
하지만 작품의 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생각이나 주장, 개념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갈고닦은 예술적 노력과 영감의 절정체가 작품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작품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세 살짜리 아이들도 그릴 수 있는(책에서 언급한 잭슨 폴락의 작품) 그림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생각해내기까지의 과정과 고뇌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작가의 예술적 사고가 중요하다. 예술가의 작품을 사는 사람들은 작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 인생, 사고을 산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봤을 때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작품을 그렸다고 해서 예술가의 작품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이미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과정을 끝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미술이 존재하지 않고 미술가가 존재했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