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종말, 직함은 의미를 잃는다

중요하지 않은 일

by 성해밀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종종 묻곤 한다.


“무슨 일 하세요?”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상대의 소득, 계층, 삶의 리듬, 가치관을 한 번에 가늠하려는 사회적인 습관이다. 직업은 오랫동안 자기소개이자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AGI 시대에 이 질문은 점점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하고, 직함은 프로젝트 단위로 바뀌며, 온라인에서는 정체성이 무한히 분화된다. 여기에 AGI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직업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정체성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직업이 사라진다는 말이 사람이 쓸모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직업으로 자신을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의사, 회사원, 교사, 작가, 노동자 등 이러한 단어들은 생계를 넘어서 자존감과 존엄, 사회적 인정의 토대였다. 직함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문제는 실업 문제보다 훨씬 깊을 것이다.


AGI 시대의 인간은 '나는 무슨 일을 한다'가 아니라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로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역할은 고정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바뀌고, 선택에 따라 달라지며, 사회적 필요와 개인의 의미가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AGI는 직업을 파괴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더 인간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나는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나는 어떤 문제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직함에만 매달린다면, 인간은 AGI보다 더 취약해진다. 왜냐하면 AGI는 직함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AGI는 스스로를 ‘AI’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저 기능하고, 수행할 뿐이다.


반대로 인간은 이제 직함 없이도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 변화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해방이기도 하다. 직업의 종말은 ‘쓸모없는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직함 없이도 존엄할 수 있는 인간을 요구하는 시대의 시작이 될 것이다.


AGI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떻게든 나의 직업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직함이 사라진 이후에도 무너지지않는 자기 서사를 갖는 일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인간만이, AGI 이후의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5화AGI가 무너뜨릴 첫 번째 질서 :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