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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y 09. 2024

사람도 바뀌다.

하늘 정원

    매월 첫째 화요일에 진행하는 월간 회의.

   정 상무가 찌푸린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이틀을 쉬고 나온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지난 토요일의 걷기 대회 - 거북이 마라톤에서 6km 코스를 걷고 들어갔으니 실제로 3일간의 휴무였지만 오히려 업무 리듬이 깨졌다는 표정이었다. 성원에게 회의를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성원의 월간 실적 발표로 회의가 시작됐다. 리오픈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2주간의 행사기간 실적은 전년의 2배에 가까웠고 월간 실적은 전년대비 60% 이상 증가했다. 예산 수립할 때 정상무가 제시했던 40% 증대가 헛소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문별 실적 발표 때는 영업팀장들은 긴장했다. 어느 대목에서 점장이 딴지를 걸지 몰랐다. 정상무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본인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질문하고 하나라도 아이디어를 보태는 평소 모습과 달랐다. 각 부서의 보고가 빠르게 이어지고 회의 마지막에야 입을 열었다.

  

  "거. 머냐. 전 입점 업체에 대해 철수 예정 통보서를 보냈습니다. 각 팀에서 참고하여 브랜드별 협상에 주력

   하세요. 우리 송안점 마진이 서울 점포보다  2% 이상 떨어집니다. 지방이고 단일점이라는 이유로 기초 마진

   을 낮게 잡고, 매출이 떨어지니까 또 깎아주고 한 결과인데, 이제 매출 오르는 걸 확실히 보여 줬잖아.

   서울에도 우리보다 못 파는 놈들 있어. 어쨌든 서울 점포를 기준으로 최대한 올려봅시다. 오늘은 이것만

   얘기합니다. 내년 장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본사에서 하겠지 하지 말고 현장에서 업체  하나하나

   빠뜨리지 말고 챙기세요"  


   회의는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 부장은 즉시 마진 조정 계획 양식을 만들어 영업팀에 배포하라고 지시했다. 성원의 일이었다. 지난 2주 동안 업무는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리오픈을 위한 한 달의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일상은 실적 분석과 자료 챙기기, 양식을 뿌리고 취합하는 반복이었다.  송안점 실적이 좋아진 것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본사에 대한 요청 사항도 모두 종이로 이루어졌다. 지난주의 걷기 대회조차도 본사의 지원 없이 송안점 인력만으로 치렀다. 양식을 컴펌받으며 점심 삭사에 대한 질문 했으나 김 부장은 좀 있다 가겠다며 뭔가 카톡에 열심히 입력했다.   


   잠시 후 그 이유를 알았다. 직원들이 술렁였다. 성원을 밀치고 각 부서의 팀장들이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점장님.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드디어 별을 다셨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이제야 회사가 알아주네요."

  축하와 감격의 인사가 이어졌다. 성원이 김 부장에게 보고하고 있는 동안 임원 인사 명령이 뜬 것이다. 김 부장은 당연한 일처럼 표정 관리를 했다. 김 부장이 상무로 승진하며 송안점 점장으로 발령 났다. 그렇다면 정 상무는 어찌 되었나 하면서 명령지 위쪽을 보니 전무 정규식 승진이다. 송안 인수에 성공한 것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승진 잔치를 했구나 싶었다. 아쉬웠다. 백화점을 잃어버려서 아픈 사람들도 있는데.


  "자. 이제 모두 전무님께 인사드리고 함께 점심합시다. 내가 미리 예약하라 했으니까."

   성원이 축하할 틈도 없이 김 부장이 팀장들을 몰고 가버렸다. 이것이 계급 차이구나 느끼면서 투덜투덜 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정 상무마저 승진해서 본사 기획실로 돌아가면 이제 이 점포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그동안 지켜본 바로 김 부장은 부드러운 사람이다. 반면 정 상무와 같은 추진력은 보지 못했다. 물론 점장이 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그동안 감추고 있던 발톱을 드러낼지도. 운동선수 출신의 승부욕도 있을 테니.

  

   옥상의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졌다. 이젠 옥상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하늘 정원이라고 사인도 만들어 붙이고 디렉터리에도 반영했다. 파티와 오픈 행사 이후 이용 고객수도 늘었다. 가족 단위로 피크닉을 오기도 하고 젊은 고객들에겐 사진 명소로 퍼져 나갔다. 고객 눈치가 보여 맘대로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권팀장이 만든 쉘터 안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피웠다. 공식적으론 창고인데 몇몇 직원만 알고 사적인 휴게 공간으로 쓰고 있는 점이 찔렸지만 이만큼 혼자 있기 좋은 공간은 없었다. 권팀장이 송안점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파티가 끝난 후 비품 정리를 위해 창고가 필요하다고 보고하고 바로 만들어 놓은 그녀의 센스는 언제나 감동이었다.


   비서실의 호출이 왔다. 점장실로 갔다. 남자 직원들이 박스 몇 개를 들어냈다. 책과 문서들이라 꽤 무서워 보였다. 바쁘게 책상을 정리하던 정 상무가 고개를 들어 성원을 바라보았다.


"또 옥상에서 거, 담배 피우고 있었나?"

"제가 담배 피우는 것 알고 계셨어요?"

"아무리 조심해도 어떤 날은 냄새가 나지. 오늘 같이 흐린 날."

"가을이니까 좀 을씨년스럽겐 해도 오늘 날씨는 맑은데요. 하늘 정원에 한 번 올라가 보시죠."

"내 마음이 흐리다고. 송안점에 계속 있으면서 멋진 성공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제야 인사명령이 생각났다. 정 상무의 페이스에 말려 너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을 시키려나 걱정도 했다. 머리 회전 속도를 말이 따라가지 못해 '거, 모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아. 전무님,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가."

"민대리 센스 없고 둔한 것은 모두 다 알아. 아. 거. 뭐냐. 나중에 섭섭해하지 말라고. 같이 고생했는데 나랑

김 상무만 승진하고 직원들은 찬 밥 신세라고. 거. 우리는 원래 올해 승진 예정이었어요. 송안점 아니었어도 

승진할 사람들이었으니. 우리가 거의 30년을 이 회사에 바쳤거든. 그. 뭐냐. 그러니까, 민 대리도 딴생각 말고 열심히 해. 연말이라고 마음 들뜨지 않게 일거리 많이 만들어하고."

  당부가 길었다. 정말 떠나기 싫은 사람 같았다. 성원은 그냥 묵묵히 듣고 '알겠습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반복했다. 정 상무가 책상 서랍에서 흰 봉투를 꺼내 책상에 툭 내려놓는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젠 대충 짐작했다. 저 서랍 안에 이런 봉투가 몇 개나 있었을까?


 "수고했는데, 거, 모냐. 신발이나 하나 사 신어. 새 신발 신고 새 점장이랑 다시 뛰라고"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더 하고 돌아서 나왔다.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이 방의 주인이 3번 바뀌는군 하며 사무실에 돌아가니 책상 정리 중이던 김 부장이 슬쩍 쳐다본다.


"전무님. 아직 계신가?"

"예. 금방 나가실 것 같긴 한데. 비서도 짐 싸고 있던데요."

"바로 서울로 가시긴 않을 거야. 숙소에 사모님이 오셔서 정리하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실 거야. 원대복귀하는 거라 인수인계도 없고. 본사는 정 차장이 잘 챙기고 있었으니까. 정치하는 놈들 정리만 하면 되지"

"인사가 늦었습니다. 상무님 영전 축하드리며, 항상 점장님의 든든한 왼팔 민대리가 되겠습니다."

"이게 왜 이러슈. 민대리 답지 않게. 내가 오른손잡이인건 잘 알면서. 언제든 떠나겠다는 의미인가."  


  점장실에 다른 사람이 올리도 없고 내일 옮겨도 되고 다음 달에 옮겨도 되는데 오늘만 기다린 사람처럼 모든 업무 중단하고 챙겨놓고 비우기를 기다린다. 마음을 안다는 듯이 안의 사람도 서둘러 방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성원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며 재밌기도 했다. 골드 시절에도 정기 인사가 있었지만 제자리에서 직급만 올렸다. 옮겨 조직도 자리도 없었다. 언젠가 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신규 점포를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후배들에게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야. 점포 하나에 점장 한 명, 팀장

  열명이면 열 한 자리가 생기고, 그만큼 승진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송안점을 성공시켜야 앞으로

  계속 새로운 점포를 만들 수 있는 거야. 손익만 따지는 기획실이나 경리쟁이들의 코를 눌러버려야 해"


   골드백화점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직원들에게 작더라도 꿈을 만들어 준다는 것. 그러고 보니 성원이 만들었던 파이롯 플랜에 온라인 사업이나 지역 슈퍼 사업등 새로운 사업부를 만들자는 제안을 넣은 이유도 직원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골드의 한계였고 드림은 그것을 잘 파악하고 들어왔다. 그들의 인력 구조 조정과 오늘 아침에 말한 마진 인상만 잘해도 영업 이익률이 4% 이상 올라갈 것이다. 거기다 매출액 증가에 따른 순이익 증가 효과까지 따진다면 이 점포는 내년에 흑자 전환을 넘어 새로운 리노베이션 투자가 가능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정 상무 계획대로 3년 후에는 전관 리뉴얼로 송안시를 넘어 전국 상위권 점포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럼 그때에 나는 무엇이 되는 거지. 지금 현재의 김 부장의 자리를 향해 가는 중이겠지. 영업 총괄팀장. 30대 중반에 팀장이 된다면 출세하는 것인가. 성공인가.


   잊고 있었는데, 리오픈하던 날, 권지상 차장이 한 말이 떠 올랐다. 계열사 지방 공장으로 발령 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의 임원 인사는 별들의 세계이고, 얼마 안 남은 직원 인사가 진짜 중요했다. 어차피 승진 대상은 아니고, 엉뚱한 사업소로 전보를 피해야 한다.

 "점장님. 다시 부탁드립니다. 저는 점장님의 왼팔로 송안점에 꼭 있어야 합니다. 본사 인사팀에 미리 손을 

  써 주세요. 연봉 안 올려주셔도 좋으니 딴 데로 보내지 마세요."     

  간곡하게 부탁하지만 김 부장, 아니 김 상무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발표만 안 했을 뿐 본사의 인사 사정과 배치가 끝난 상태라 어쩔 수 없다며 발뺌한다. 그렇다면 지난번 권차장이 왔을 때 뭔가 냄새를 맡고 암시를 준 것일까.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까 하는데 눈앞에 그가 서있다.


"상무님, 승진축하드립니다. 회장님께서도 엄청 기쁘다고 전해 달라하셨습니다."

"지가 도와주지도 않고, 뭘 기뻐해. 회장님 아니었으면 2년 전에 승진했을 거다. 권차장도 조심해. 

  너네 회장님 너무 믿지 말라고."

"그래도 저는 이번에 팀장 됩니다. 전무님이 승진하셔서 팀장 겸직 떼서 저 주시고 기획실장에 전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팀장 업무 인수받고 사무실로 가져갈 짐 가지러 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사모님과

  집으로 가져갈 짐만 가지고 가실 수 있도록."  

"민대리 잘 봤지. 저게 오른팔이 일하는 방법이야.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저는 그 수준이 못돼서 왼팔. 근데 차장님은 자기가 팀장 되는 거 미리 아시면 다른 것도 아실 것 아네요.

 그러니까 말씀해 주세요. 저 어디 딴 데로 가나요."

"지난번에 말한 게 다야. 모든 가능성 다 있다고. 근데 딴 데로 가는 거 미리 알면. 모 사표라도 낼라 그러나."

"노동부에 제소하고, 1인 시위하고 그런 거 알아보고 준비해야죠."

"그런 거 다 무의미하다고 했는데. 이미 완벽한 드림그룹 직원이기 때문에."


  그룹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백화점 직원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그룹이라고 하는 것은 계열사로 보낸다는 의미로 들렸다. 김 부장도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긴. 민대리는 젊고 키도 크고, 드림 항공 가서 일해도 될 거야. 비행기 문 닫을 힘도 있고."

"지난번엔 계열사 공장이더니 이번엔 항공입니까. 저는 점장님만 믿습니다. 권 차장님은 의리가 없어요."

"나도 별로 의리는 없어. 민 대리가 계속 있으면 좋지만 회사에서 명령을 내리면 어쩔 수 없지."

  권차장이나 김 상무나 말을 뱅뱅 돌리며 성원을 놀리기만 할 뿐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새 신발 신고 새 점장과 뛰라던 정 전무의 말이 더 확실한 힌트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고 2주를 버티기로 했다. 직원들은 그때쯤 발령이 난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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