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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y 15. 2024

잠시, 안녕입니다.

하늘 정원

"임원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실감했어요."

"......"

세안은 질문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성원은 멀리 호수 너머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처음부터 임원인 사람을 볼 때는 실감을 못했죠. 부사장님 같은 분, 그 자리가 누군가에겐 얼마나 힘들게 얻어낸 자리인지 이번엔 김 부장님 승진하면서 알았어요. 혼자 쓰는 방도 생기고, 자동차랑 핸드폰이랑 회사에서 나오고, 골프장과 리조트 이용에 건강 검진까지 맘대로 쓸 수 있는 것 보고 놀랐어요. 그래서 임원이 되어야 하는구나.  연봉 올라가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구나 알았죠."

"그게 어떤 기분일지 나도 모르겠네요. 내가 힘들게 얻은 게 아니라 날 때부터 임원이었으니까. 그래서 성원 씨 도 임원이 되고 싶었구나."


   호텔에서 파스타를 먹은 날 이후 김세안이 먼저 톡을 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성원도 일상적인 휴무 체제로 돌아오면서 주말에는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지난주에는 세안이 드림백화점 걷기 대회에 참가해서 함께 걸었고, 이번 주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송안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아지트 앞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들고 호수를 내려다보며 벤치에 앉았다. 앞에는 똑같은 자전거 두 대가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성원의 낡은 자전거로는 다리만 아프다고 세안이 어디선가 데려온 녀석이다. 엉덩이가 좀 아프긴 했지만 30단 기어로 수월하게 언덕을 올랐다.


 "그런 게 있긴 해요. 목표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 일을 하는 또 다른 이유와 내 삶에서 찾아야 할 것. 그런 것을 다시 생각했죠. 특히 김 부장님 사모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게 바로 느껴졌어요. 우리 엄마 생각도 나고. 내가 임원 될 때까지 살아 계실까. 한편 정 규식 상무 생각도 했어요. 한 시간 후에 떠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의 때 끝까지 다 챙기고 엄중하게 업무 지시한 정 상무를 생각하면 저런 사람이 임원의 본보기구나 했어요. 내 기억에 골드의 임원들은 회사 팔리기 한 두 주 전부터 회의도 안 하고 밖으로만 나돌았던 것 같은데. 그때 새로운 자리들 찾아 나선 거죠."

 

   세안은  종알거리는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새로웠다. 두 사람 사이가 그만큼 편해졌다는 의미였다. 서로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커피 마시니까 힘이 나는데요. 저 카페인 중독인가 봐요. 그동안 하두 먹어서."

'그래도 들어가서 뭘 좀 먹을까요!"

헬멧을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로 다가갔다. 세안은 성원을 앞세우고 뒤에서 따라갔다. 아지트를 향해 자전거를 끌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저장했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며 전화를 받았다.


'녜. 네. 그럼 저는.."

 전화를 끊고 뒤에서 지켜보던 세안을 향해 말했다.

"저. 본사로 발령난데요. 권팀장인데 자기 팀으로 당겼데요. 그리고 방금 인사팀에서 확정했고, 내일 사장 결재 들어간데요. 그럼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명령 뜬데요"

"그걸 미리 전화해 준 거야. 딴생각하지 말라고."

"맞아요. 자기가 스카우트해 가는 거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명령 나는 즉시 달려오라고. 미리 전화하는 이유도 내가 이뻐서 그런 게 아니라 서울에 있을 곳을 미리 정해야 나중에 업무 손실이 없다고."

"성원 씨 이쁜 것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서울에 내가 살던 오피스텔도 그대로 있으니 거기 들어가는건

  어때요. 가끔 서울 출장가면 쓸까하고 그대로 나눴는데 집이랑 가구랑 다 있어서. 편할텐데"

"부사장님. 그건 아니죠. 제 살 집은 제가 구해야죠."

"누가 뭐래. 방세를 할인해 줄 수 있다는 거지. 누가 거저 살라고 했나."


   성원은 자신이 우스웠다. 송안에 남아야 한다고 그렇게 고집부리며 부탁하던 민 대리는 어디 가고  어느새 본사 생활과 서울 입주를 계획하는 있는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다른 생각이 생긴 건지. 아지트로 들어서자 세안이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를 내놓았다.


"이번엔 저 지도와 재떨이는 서울에 가져가야겠어요."

"이 방에서 가장 쓸데없는 두 가지를 고르다니. 남의 집 살이 하는 사람이 실내 금연도 모릅니까."

"재떨이로 안 쓰더라도 제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까 가져가야죠. 그리고 저 지도에 표시된 도시 중에 아직 안 가본 곳에 갈 준비를 해야죠."

"그 도시 목록은 나도 필요하겠네. 함께 가야 하니까. 민대리가 세상에 나갈 준비를 제대로 하는 것인가."

"후후. 그렇죠. 지난번처럼 지쳐서 돌아오진 않을 거예요."

  그랬다. 입으로는 엄마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지쳐서 돌아왔었다. 성원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 주변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걱정했고 인아는 안쓰러웠했다. 3년 전 사무실에 처음 들어서며 성원과 마주친 세안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덕출을 만나 자세한 스토리를 듣고 성원을 관찰했다. 그렇게 한 미디 아는 체도 못하면서 그 아이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어이없게도 성원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날 준비를 하게 했다.

 

"본사는 확실하게 주말과 공휴일 다 쉰데. 권팀장 말로는 송안에 오기 싫어서 안 올 수는 있어도 시간 없어 못 온다는 말은 못 한데. 쉬는 날마다 올께"

"그건 전에도 그랬다. 네가 오기 싫어 안 온 것이지. 누가 못 오게 막은 게 아니야."

"그댄 진짜 바뻣다니까. 스타트업이 얼마나 사람 죽이는데. 하여간 이젠 매주 올게요. 금요일 저녁엔 집으로 퇴근. 일요일 저녁에 서울로 고고."

"꼭 오지 않아도 돼. 너도 인제 서울 강남에 혼자 살면서 철마다 해외 여행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

"그게 무슨 커리어 우먼이냐. 바람난 거지. 내가 이번에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게 있어.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엄마도 여기로 온 후에 더 많은 사람들 보니까 좋았지. 농장에서 매일 발두 못하고 있는 것보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미소 지으며 성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세상에 내놓는 딸이 지난 두 달의 시간 동안 한 뼘은 큰 것 같았다.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에 치여 사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깊은 생각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대견했다.


"엄마.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내일 백화점 쉬는 날인데 우리 같이 드라이브라도 갈까."

  한 달에 한 번 쉬는 월요일.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할 계획을 세웠다. 엄마는 아빠에게 잠시 들러서 농장에 가보자고 했다. 농장의 모든 축사는 철거되고 별채만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일부러라도 그쪽을 피해 다녔다. 별채가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는 성원의 말에 언젠간 가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이제 그날이 왔다 싶었다. 성원도 엄마에 거 보여주고 싶었다. 소녀 시절의 꿈이 담긴 그 공간을 엄마에게 딱 한 번만 보여주고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내년에 송안점에서 가족 농장을 시작한다면 별채에 고객 휴식 공간을 만들라고 권유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 엄마와의 나들이를 약속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다른 선택을 했다.이번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방 천장에서 형광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송안의 친구들! 잠시, 안녕입니다."

  









에필로그


"정 규식 실장님이 기획실로 데려가겠다는 걸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 알아요!. 힘들었어요. 권지상 차장까지

  나서는 바람에. 도대체 그 양반들이 송안에서 민대리에게 얼마나 신세를 진거야. 하여간 그쪽으로 가는 줄

  알고 송안점에서 놔 준걸 내가 하이재킹 해온 거니까 즐겁게 일하고 내년에 꼭 승진하자고요. 그때 기획실로

  데려가든지, 어쨌든 1년 동안 내가 시골 물 쫙 빼놓겠다고 했어요."

"팀장님. 시골 물이라니요. 저 서울에서 10년 산 사람입니다."

"그래요. 서울 사람. 미리 귀띔해 주었으니 숙소는 구했겠죠."

"일단 전에 살던 동네에 원룸 하나 구했습니다. 시세가 그대로라서 쉽게 해결했습니다."

"그럼 주말에 이사하고 월요일부터 빡세게 일합시다."


  목요일, 드디어 인사 명령이 떴다. 금요일 아침 본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권새록 팀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업무 오리엔테이션과 본사 모든 사무실로 임원부터 사원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하게 했다. 그동안 무슨 고민을 했는지도 기억할 틈 없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강남, 본사, vip, 마케팅, 지하철,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독신 생활. 모든 것을 즐겁게 맞기로 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시작했다.    




   "그러게 우리 오피스텔로 가자니까요. 거기가 회사도 가깝고 보안도 좋은데... "

   마침 서울에 볼 일이 있다며 태워다 주겠다고 따라온 김 세안이 굳이 집까지 따라 들어왔다. 주차장이 협소하다며 투덜대기 시작한 그는 공동 현관 비밀 번호를 묻고 주소와 함께 메모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낡았다고 걱정하고, 세탁기와 에어컨도 불만 신발장 크기까지 트집 했다.

  

  "왜 따라와서 괴롭히는 겁니까. 회사 일로 오셨다면서 일 보러 안 가세요."

  "주말에 무슨 일. 업무는 월요일부터인데 미리 온 것이니 그리알고. 대충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아니지 그래도 이사하는 날이니까 역시 짜장면 시켜 먹여야 하나."

  "부사장님. 아니 세안이 형 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위치 알고 둘러보셨으면......"

  "내가 같이 온다고 하니까 강여사님이 신신 당부하셨어요. 꼼꼼하게 살피고 오라고."

  "물론 고맙습니다만 저도 월요리부터 출근하려면 준비할 게 많습니다."

  "그럼 배달이 낳겠군. 외식하는 것보단. 밥 먹고 한강에나 갑시다. 산책로 점검도 할 겸."


  강여사는 물가에 집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성원의 사주에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물이 보이는 곳에 살아야 보완할 수 있다 말했다. 그래서 호숫가에 집을 지었고, 바닷가에 커피하우스를 열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서울에 처음 자취집을 얻을 때도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한강변을 찾았다. 그래서 여의도와 마포를 고민하다 지금의 동네에 정착했다. 그래서 이번엔 고민 없이 이 동네로 돌아왔다. 한강 산책로는 뻔히 알고 있는데 거기까지 점검해야 한다는 김 세안을 바라보며 저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의아했다. 만날 때마다 평범해지는 사람이었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던 날의 신비감과 낯섦으로부터 자상한 익숙함으로 진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한강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밤섬이 보이고 여의도의 야경이 휘황하게 펼쳐진 곳. 거기서 맥주 캔을 따는 순간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두고 간 것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버리고 도망간 것들을 다시 대면할 수 있을까.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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