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L May 01. 2024

시대가 바뀌다.

하늘 정원


  2019년 10월 16일

  모든 준비는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드림 백화점 간판이 달리고, VIP 라운지도 문화센터도 오늘부터 회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오픈 축하 한정 판매 상품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백화점 주변을 둘러쌌다. 10월의 높고 푸른 하늘 사이로 작열하는 태양이 송안시를 더욱 빛나게 했다.


   정문앞에 놓인 단상위에서 오픈 세레모니 리허설을 점검하는 김부장도 평소와 달리 긴장하여 예민했다.직원들의 동작을 하나씩 점검했다. 간밤의 파티에 지친 권새록 팀장은 그런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아직도 늘씬한 모델들이 쟁반에 가위 들고 다니면서 테이프 커팅 보조하는 것은 맘에 안들어. 양복입은 아

  저씨들만 쪽 서서 테이프 자르고 폼잡는 것도 맘에 안들고. 그냥 가위 나눠주고 지들이 알아서 테이프를 자

  르던 리본을 자르던 맘대로 하라 고래. 20년 동안 하나도 변하질 않냐"

  "20년전에는 백화점 안다니는 꼬마셨잖아요?"

  "그래도 내가 손님으로 다 봤다고요. 다섯살때부터 드림 백화점 오픈하는 곳은 다 갔지롱"

   권새록의 근본모를 말투에 당황했다. 어쨋든 어젯밤 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유로 오늘 행사에서 두 사람은 열외였다. 관객으로서 지켜보고 직원의 의무로 성공을 기원하면 된다했지만 그게 또 맘대로 되지 않았다. 행사장 주변을 계속 둘러보며 하나라도 도울 일이 없나 찾았다.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무전을 듣자 김부장은 리허설을 마무리하고 매장을 가로질러 후문쪽으로 향했다. 후문옆 카페에 오늘 참석하는 귀빈을 위한 대기 공간을 마련했다. 황인아 매니저와 라운지 직원들이 다과를 세팅해 놓고 귀빈들의 상견례를 도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상무가 회장님과 송안 시장을 인사시켰다. 지역 국회의원과 백화점 협회장도 반갑게 인사하지만 서로 초면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찻잔만 바라보고 있을 때 대북 소리가 울리며 개막을 알렸다. 앞다투어 일어선 내빈들이 회장님을 선두로 줄지어 정문앞으로 이동했다.


 "아무도 연설 안하기로 했죠?. 그런 걸로 시간 끌고 싸우면 안됩니다."

 "그래도 시장은 한마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인사말 한마디 합니다. 보좌관이 너무 사정사정해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시장이 단상 중앙에 나서 뭐라뭐라 했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자기가 열심히 뛰고 있다는 말인데 오늘도 먼저 나와서 재벌 회장을 영접하는 모습을 보면 열심히 뛰는 것은 확실했다. 시장이 자리로 돌아가고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테이프를 자르고 팡파레가 울리는데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도열한 대형 그대로 기념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은 한시간 내로 인터넷에 퍼질 것이다. 단상위의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왔으니까. 사진 촬영까지 무리없이 끝내고 매장 문을 열어야 할 시간. 고객들의 바쁜 걸음을 통제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정문쪽으로 향하는 성원을 누군가 잡아끌었다. 


"언제 왔어요?"

"회장님 모시고 왔지. 어쩨 그동안 보고 싶었나?"

   보고싶다기 보단 약간 궁금하기는 했다. 어제 파티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다가 올 이유가 없다 단념했다. 옥상에서 파티를 하는 어이디어를 처음 말한 사람이 안나타나니 섭섭했다. 오늘 회장님이나 사장님과 함께 올 것이란 예상은 했다. 경로잔치때 잠깐 보고 열흘 남짓 지났는데 그런데로 반가왔다. 그게 다 였다. 따로 연락하거나 언제 올지 기다리는 마음은 없었다. 눈앞에 있지 않아도 존재함을 알고 있기에. 궁금하긴 하지만 귿이 확인할 필요없이 잘 사는 사람이었다.

   정문이 열리고 고객들이 몰려 들어갔다. 다행히 큰 혼란 없이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신규 점포가 아니라 리오픈 점포이기 때문에 고객들도 매장 구조에 익숙하여 혼란의 여지가 적었다. 우당탕탕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리고 뒤에 남은 것은 취재 기자들과 구경 나온 노년층 고객들이었다.


 "뭐 개업 떡 그런 거 안 나눠주나?"

 "어르신.요즘은 그런 거 안 합니다.대신 초특가 할인 상품과 빅찬스 경품행사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30년전에 골드 백화점 개점 떡은 맛있었는데."

 "30년전 맛을 어떻게 기억해. 작년에 나눠준 것 말하는 거지. 매년 나눠줬잖아"

  매년 11월이 되면 개점 축하 떡을 나눠주는 것이 골드백화점의 전통이었다. 금년 11월에는 그런 행사가 없을 것이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열렸다. 아직 수긍하지 못하고 궁금증 많은 어르신들이 물러나고 매장 투어를 하고 있는 권회장 일행에게 기자들이 따라 붙으면서 정문 부근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 이렇게 지났군요."

 "그렇지 이제야 백화점 다와졌지"

정문이 한산해지자 시장 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담배를 피는성원을 권차장이 따라왔다.
 "정말 거만하게 말씀하시네. 골드도 좋은 백화점이었어요. 지역 주민들에겐 사랑방같은 존재였죠"

 "그런가. 그래도 백화점 수준이 다르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업그레이드 시킨거야. 표정들 보라고 놀라고

  기뻐하면서 두리번거리고 안도하는 모습들. 고객들의 반응이 확실히 보이지"

 "글쎄요. 맨날 보는 표정들인데요. 사실 드림 내부에서는 송안점을 한 3등급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관찰 중이지. 신규점도 아니고 전략 점포도 아니고 어정쩡한 중고 점포인데 잠재력이 얼마나 될지."

   권차장 말을 들으며 성원은 지난 한달을 회상했다. 느닷없는 인수 소식, 정상무와 권차장을 만나던 날.

정상무의 저돌적인 태도와 꼼꼼하게 업무를 체크해 주던 권차장. 그리고 그 틈새에서 직장을 잃은 친구 동료들. 어느새 잊혀져 가던 그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경영진을 비롯해 책임져야 할 간부사원들은 어딘가 모여 재기의 꿍꿍이를 다지고 있을텐데, 진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후 한달간의 업무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떠난 동료들과 매장 개편 과정에서 철수한 협력 사원들이었다. 


"내가 드림백화점 사람이 아니었단 것을 이제야 기억하네요!"

"민대리는 드림백화점 사람이 맞아. 골드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였지. 지난 한달간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자격있음을 증명했지."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 달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네요."

"설마 의리같은 이야기 하려는건 아니지. 그건 이번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아. 그들이 당신들을 버리고 간

 거니까. 우린 그냥 각자의 능력과 노동을 파는 개인들이야. 거기서 버티고 인정받고 성장하는 거야.

 이건 도덕적 문제가 이니야. 생존 문제지"

"ㅎ프..ㅎ.."

 성원은 그냥 웃었다. 말은 맞지만 회장을 수행하고 온 오너 측근 권 차장이 말하니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언젠가 민대가 우리는 좀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다고 했지.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다음달 정기 인사를 기대해 보라구 우리가 더 자주 만나게 될 수 있으니까."

 "우리? 우리가 누군데요."

 "이번에 송안점 리오픈에 함께한 사람들, 정상무님 이하 나랑 권 새록이, 민대리, 또..."

권 차장이 말을 흐렸다. 성원은 마음속으로 함께 한 사람들을 더 해 나갔다. 김승호 부장, 황인아와 한현주, 그리고 송안점의 이천명 직원들이 모두 애썼는데 그들 모두 오늘 즐거운 오픈이 되고 있는 것인지.

 성원이 멈칫했다. 그랬다. 지난 3년간 이 백화점의 직원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냥 직장이었고 동료였을 뿐 그만 두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인아 처럼 동창이자 단짝인 친구가 있지만 그것은 백화점밖의 개인 관계였다. 단지 엄마와 함께 살려고 돌아 온 것이고 직장이 필요했을 뿐. 백화점이라는 산업에 애착을 갖거나 회사의 성장에 미래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순간의 질척거림은 무엇인지.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리셉션이 시작될테니."

 "아 회장님 챙기셔야죠.딸랑딸랑...딸랑."

  권회장의 매장 투어가 끝나고 내빈과 협력업체 대표등이 함께하는 오찬이 예정되어 있었다.식장으로 올라가면서 성원이 권차장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엄마랑 같이 살려고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본사나 다른 사업소로 발령나지 않게 미리 손쓸수 있나요."

 "일단 발령나면 명령에 따라야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고"

 "차장님이 빽좀 되 주세요. 저 그냥 여기 있어야 해요. 중이 절을 사버리면 안될까요?"

 "하하. 그러면 지난 번 경로 잔치때 회장님께 잘 했어야지. 그때 회장님이 민대리 눈여겨 보셨어요. 오지로

  발령낼 수도 있을 거야. 백화점 말고 계열사 공장 같은데로 보내는 경우도 있어."

 "회사가 망하고 인수한 회사에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보낸다면 그건 일종의 차별, 분리 정책 아닌가요.노동부

  에 제소할 수도 있어요. 미리 이야기 할때 힘써 주세요. 진짜 이 회사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뭐죠."

 "또 같은 얘기. 민대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앞으로 20년 동안 한달 전과 같은 고민은 계속되지."


   행사장 앞에서 권차장과 헤어진 성원은 한달 전 잔류를 선택했던 때를 생각하며 옥상에 올라갔다. 지난 밤 화려하게 빛나던 조명은 사라지고 나무와 이글루, 무대만 덩그러니 놓인 정원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담배 하나를 물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 회사를 다녀야할지 고민하며 살 것이라는 권차장의 말은 채념인가 저주인가.분간할 수 없었다. 담배 연기만 퍼져 나갔다.



이전 27화 파티의 밤이 무르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