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L Apr 24. 2024

파티의 밤이 무르익다.

하늘 정원

"이렇게   열심히 나무 심어놓고 조명 들이대서 나무 말린다고요?'
 성원의 뜬금없는 컴플레인에 권팀장이 배시시 웃었다. 황인아 매니저는 전화기에서 귀를 떼지 못했다. 뭘 입어야 하냐, 누구도 오냐?, 먹을 것은 충분하냐?, 남편 데리고 가도 되냐?. 고객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틈틈이 올라와 몰래 구경하고 가는 매장 직원들을 단속하는 것은 한현주의 몫이었다. 파티 시간은 다가오자 백화점 직원들이 하늘정원 입구에 도열했다. 턱시도 차림의 정상무와 나비넥타이로 멋을 낸 김 부장을 비롯하여 모든 팀장들이 고객을 에스코트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vip 올라갑니다."

 무전기가 울리자 모두 긴장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 고객들이 입장하는가.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쌍의 커플이 보였다. 퍼플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 민성원과 권새록이었다. 어느새 1층에 내려가 발렛 데스크와 주자창 상황까지 확인한 두 사람의 등장에 직원들의 긴장이 다소 풀렸다. 


 "뭐야 긴장했잖아. 근데 우리 권팀장이 새삼 꾸미니 미인이네."

 김 부장의 맥없는 농담에 권팀장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고, 두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서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적당한 사이즈의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로 멋을 낸 여성은 기대 그대로 품위와 자태를 뽐내는 강여사였다. 부끄러운 미소로 어깨를 움츠린 강여사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면서 환영의 음악이 퍼졌다. 가을 정원, 황금빛 드레스와 적절한 볼륨감의 헤어 스타일링, 여유를 찾고 미소 짓는 그녀에게 정상무가 다가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점장 정 규식 상무입니다. 경로잔치를 비롯해서 우리 송안점 오픈에 많은 관심과 도움

  주셨는데 드디어 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오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저희 아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지독하게 일만 시키신다고."

  '엄마. 그만하시고, 이쪽으로"

  성원이 말을 끊고 나서며 두 사람을 분리했다. 계속 놔두면 그동안 성원이 들었던 모든 독설에 대한 반격이 이루어질 태세였다. 안면 있는 김 부장과 눈인사를 나누고 헤드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두대의 엘리베이터가 연달아 땡땡거리며 vip 고객들의 입장을 알렸다. 스탠딩 파티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은 쑥스러워하며 음료 잔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눴다. 고객 대부분이 점심 무렵부터 백화점에 와서 단골 매장에서 노닥거리며 분위기를 살피다 올라왔으므로 자연스레 단골 브랜드별로 고객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룹별로 브랜드 특징이 보이는 파티복을 사 입고 있어 어느 매장 단골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한쪽 편에서 대화에 열을 올리는 부시장 사모님에게 강여사와 성원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늘 날씨가 쾌청해서 분위기가 사는 것 같지요."

"음. 정말 택일 잘했네요. 내일 드디어 드림백화점 오픈이라니. 내일부터 우리 vip 들도 바쁘겠어요."

"저희 직원들이야 바쁘겠지만?"

성원이 애매한 미소를 띠며 물어보자 옆에 서 있던 한의원 사모님이 나섰다.

"민대리, 백화점 주인이 누구야?"

"그거야 당연히 고객님들 이시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빠지는 거지. 그동안 공사하느라 못 본 매장들, 새로 들어온 상품들 검사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사모님"

 '맞아. 맞아. 그동안 심심했어. 오늘만 기다렸네' 둘러선 일행들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나저나 큰 일 끝냈으니, 강사장님도 이제 집안 일 하셔야죠. 따님이 이렇게 꽉 찼는데. 사귀는 사람

  없으면 우리가 좀 알아볼까요?. 시청에도 있고, 법원에도 있고, 병원도 있고, 좋은 청년들 많은데"

 화제가 자연스레 넘어가자 성원은 좌불안석이었다. 엄마와의 친분을 내세워 나이를 물어보고 출신 학교를

물어보는 여사님들의 무례에 얼굴만 붉혔다.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인아가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문제의 조명이 은은하게 달아오르는 사이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10월의 밤을 달궈 줄 초대 가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무지갯빛 조명과 달달한 가수의 음색, 나무의 냄새까지 오감이 만족되는 순간, 옆에는 이제 동지가 된 친구들이 함께였다.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며 정상무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소프트한 대화를 나누는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백화점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그의 말처럼 고객들의 난처한 요구에도 여우처럼 빠져나가거나, 담당자를 불러 즉각 처리해 주는 모습이 유능한 점장의 표본 같았다.  


  "저런 것이 임원의 자질인가. 평소에 자기 부하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오늘 고객들에 보이는 모습의 양면성"

  성원은 정상무의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면서 세상 누구에게도 배울 점이 있음을 다시 깨달았다. 엄마도 오랜만의 외출에 흥겨운지 지인들 사이를 분주하게 옮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흥이 계속됐다. 이런 프로그램을 집어넣다니.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자 팀장들이 먼저 나서 춤을 춘다. 고객과 직원들이 어울려 춤을 춘다. 어색해하며 망설이는 고객들에 비해 직원들은 많이 해 본 솜씨다.


 "저분들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예전 사장님 중에 한 분이 우수 고객을 응대하려면 그들의 라이프 스티일을

  알아야 한다면서 문화센터에서 댄스 배우게 했어요. 내가 명품만 입는 것도 그때 그 사장님이 고객 수준에

  맞춰 입으라 그래서 그런 거고, 식품팀장은 요리해야 하고, 스포츠 팀장은 운동해야 하고 그때 정말 야단이 

  아니었지요. 문화센터 가면 직원들이 득실득실. 지금은 그렇게 못하죠. 지금 그런 얘기하면 직원들이 회사

  지원금부터 따지고 들걸요."   

  권 팀장이 설명했다. 정말 놀라운 백화점이다. 고객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춤 연습까지 시켰다니. 타고 난 몸치인 성원은 슬며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다가 멈칫했다. 분명 뒤에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난 느낌이었다.


"성원 씨는 춤 안 춰요?"

"언제 오셨어요. 제가 계속 입장 고객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있었어요. 성원 씨가 바빠서 날 보지 못한 거지."

"아! 부사장님 같이 큰 사람을 못 볼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셨네요. 그래서 제가 못

 알아본 거군요. 어머님 모시고 오신다더니 오늘 정말 댄디하게 차리셨네요."

빙글빙글 웃는 그의 미소에 성원은 궁금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핑계고. 이미 저기 여사님들과 어울리시는 중이고. 내가 온 것은 성원 씨를 볼 수 있겠다 싶어. 

  신나게 달려왔죠. 어머니 미용실에서 픽업해서 서둘러왔는데 인제 만났네요." 

  그의 얼굴이 약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성원의 얼굴도 역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음악이 바뀌고 팀장들은 드디어 교습 실력을 발휘하겠다는 듯 경쟁적으로 정원 중앙으로 나섰다.


"우리도 춤출까요?"  김 세안이 훅 들어왔다,

"저 왈츠 출 줄 모르는데요."

 "나만 따라와요. 내가 샌디에이고 방식으로 출 테니. 낙하산 타는 거랑 비슷해요."

 "왈츠에 샌디에이고 방식은 첨 듣는데요?"

 세안의 손에 이끌려 춤추는 사람들 틈에 한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허리를 감아오는 세안의 팔을 느끼며 상체를 조금 젖히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부르스 아닌가요?"

 "하하. 조금 더 스텝을 경쾌하게 하면 샌디에이고풍 왈츠가 되는 겁니다. 3박자로 스텝만 맞추면."

  말에 비해 그의 스텝은 잘 맞지 않았다. 약간의 틈이 지나며 그의 리드가 절제되고 리듬을 잡아갔다. 그가 이끄는 데로 스텝을 따라가며 돌라면 돌고 멈추라면 멈췄다. 성원의 가슴은 쿵쿵거렸다. 멀리서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엄마와 김 부장이 보였다. 반대편으로 돌며 보니 인아와 현주도 자기만 보고 있는 듯했다. 사실 키 큰 젊은 커플의 어지러운 스텝은 파티장의 모든 눈길을 끌어 당겼다. 주변의 눈길을 의식하며 당황하는 성원과 달리 세안은 점점 자신감 넘치는 고급 기술을 구현하려 했다. 다행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음악이 멈추고 성원은 세안을 끌고 정상무에게 향했다.


 "점장님, 전 골드백화점 김세안 부사장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업무 때문에 몇 번 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뵈니 다른 느낌입니다. 이렇게 젊고

  핸섬하신 걸 놓치고 있었네요. 정말 김사장님은 든든하시겠습니다.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수 협상 때 만난 적 있는 두 사람은 편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 상무는 김사장과 말다툼한 앙금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성원을 향해 짓궂게 한마디 했다.

 "우리 민대리는 부사장님이 얼마나 반가우면 그렇게 손을 꼭 쥐고 있나요?"

 댄스가 끝나자 마다 손을 놓지 않고 황망하게  방향을 틀어 정상무에게로 왔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없애려 한 행동이 더 부끄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민대리가 정장과 힐이 익숙지 않아서 넘어질 것 같아 제가 좀 잡아주고 있습니다."

 세안이 가볍게 대답하고 성원도 재빨리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나눴다.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정상무는 다른 고객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계속 지켜보던 권새록 팀장이 자리를 채웠다.


 "파티의 마지막 순서인 행운권 추첨 때 김대표님이 추첨해 주시죠. 고객들께 간단한 인사말씀도 하시고 우리

  직원들이 뽑는 것보다 대표님이 뽑는 게 공정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부탁드립니다."

  권팀장의 제안에 성원을 한 번 바라본 후 동의했다. 댄스에 이어 다시 초대 가수의 공연이 이어지면서 파티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여기저기서 계속 건배 소리가 울렸고 준비된 음식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급조된 나무와 이글루를 배경으로 포토 타임이 진행되고 참석자들은 추억의 한 조각을 만들었다.


  "딱 한 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백화점의 바뀐 모습을 보며, 지난 30년간 노력했지만 고객 여러분께 더 많은

   즐거움을 드리지 못한 저희들이 정말 죄송하다고 다시 느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백화점의 고객이기

   이전에 제 친구들의 부모님이시고, 제 어머니의 친구들이시고, 그들의 자녀이시고, 또 그 친구들이시고.

   하여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지역 사회, 이웃사촌, 그런 말만으론 어려서부터 저희가 받은 사랑에 보답

   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이제 드림백화점이 되었지만 항상 그랬듯이 백화점을 사랑방으로 이용하

   시고, 그렇듯 아들처럼, 동생처럼 직원들을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행운권 추첨이 시작되었다. 진행을 맡은 권팀장이 정확한 상품 설명을 한 후 추첨권이 들어있는 통을 흔들었다. 세안과 드림백화점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패션 상품권부터 시작하여 가전 제품까지 당첨자를 발표했다. 당첨된 고객은 환성을 울리며 주변 친구와 기쁨을 나누는 사이 마지막 상품, 순금 행운의 열쇠 추첨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상품은 제가 아니라 송안점 점장이신 정 규식 상무께서 추첨해 주시죠. 이제 미래로 가야지요."

 정상무가 앞으로 나와서 권팀장 앞의 통 안에서 번호표 한 장을 끄집어냈다. 약간의 리듬을 타며 당첨자를 발표하는 순간, 한쪽에서 환호가 터지고 사람들이 손뼉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마지막 당첨자는   오십~~ 사번~~"

   "짰네, 짰어!!

   "다시 해라. 뽑히면 기부한다고 했다."

   "이 마을은 모든 게 순리로 돌아가냐"

   함성과 야유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당첨된 행운권을 들고 나온 것은 민 성원의 엄마. 강 현옥 여사였다. 권팀장도 멘트를 이어가지 못했다. 정 상무는 크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엄마를 무대 위로 이끌었다. 강 여사는 숨을 몰아쉬고 행운의 열쇠를 받았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움직이는 웃음을 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 딸들이 오늘 이렇게 꾸며 놓고 지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보기 좋아서 나도 주책없이 즐겼습니다.
   드림 백화점의 오픈이 송안시의 새로운 활력이 되길 바랍니다. 이건 비밀인데 오늘의 운세가 좋아서 황금

   열쇠 당첨될 걸 예상했습니다. 송안시의 모든 젊은이들도 이 백화점에서 꿈을 키우고 저마다의 황금 열쇠를

   찾길 바랍니다." 


   엄마를 파티의 여왕으로 만들겠다는 권팀장의 공약은 실현되었다. 이 도시에 살았고, 자식을 키웠고, 그들의 자식이었던 모든 사람들이 엄마는 당첨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다. 가을밤의 파티는 계속되었다.



이전 26화 그녀가 알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