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정원
"어제도 늦게 들어왔는데, 오늘 이렇게 일찍 나가야 하니?"
"본사 회의가 있는데, 어제는 자료 만드느라 늦었고, 오늘은 회의 시간에 대기하려고 일찍 가는 거야"
"네가 회의 참석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내가 만든 자료로 우리 점장이 발표하니까. 혹시 모르잖아. 자료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발표 전에 점장이 궁금한 게 있을 수도 있고. 미리 가서 준비해야지."
"그래. 오늘은 그렇고. 주말에는 좀 쉴 수 있는 거냐."
"글쎄. 다음 주가 오픈인데. 아무래도 어렵겠지. 각종 행사도 많고, 챙길 일도 많고, 눈치도 챙겨야 하고"
식탁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강여사는 성원의 얼굴만 바라보며 이것저것 질문 했다. 미리 차려둔 반찬도 하나씩 짚으며 젓가락을 인도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3년째 백화점을 다녔는데, 갑자기 매일 야근에 아침에도 서둘러 나간다. 꼬박꼬박 쉬던 아이가 쉬지도 않는다. 회사 주인이 바뀌고 일이 좀 늘었다 생각은 했지만 근 한달째 그런 생활을 한다.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폼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건강을 위해 쉬면서 일했으면 좋으련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화점에 집어넣는 게 아니었는데. 3년 전에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할 때 단호히 막았어야 했다. 서울에서 잘하던 일도 때려치고 다 정리하고 내려 올 이유가 없었다. 그 때 직장을 잡지 못했으면 제 풀에 서울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저 성격에 커피하우스에서 콩 볶으며 세월 보낼 아이는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백화점에 취직시킨 것은 실수였다. 지금 저렇게 버텨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에 더 미안했다.
"그 회사는 왜 그렇게 너만 부려 먹는데. 직원이 부족하면 더 뽑든지 하지. 있는 직원들로 자르면서."
"엄마.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회사가 자른 것 아니고, 그 사람들이 그만둔 거야."
말하다가 뜨끔했다. 어느새 드림백화점의 논리에 세뇌된 건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하지. 자료를 많이 만들다 보니 모든 자료가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현상. 이것도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엄마의 걱정을 뒤로한 채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핸들을 움켜쥐고 창을 열였다. 10월 아침의 쌀쌀한 기운이 들어왔다. 일교차가 커지는 계절, 아직 춥지는 않다. 정신없이 물들어가는 은행잎 가로수. 다음 주면 절정에 이를 듯했다. 맑은 하늘이 성원을 유혹했다. 추워지기 전에 스카이다이빙 한번 더하고 싶다. 이번 주말에 하루만 시간을 낼 수 없을까. 그리고 김세안에게 부탁하면 다시 데려다주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본다. 기억나지만 잡히지 않는 기분, 하늘을 나는.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 다시 엄마 생각. 엄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회의는 잘 끝났고 정 상무는 오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덕분에 숨을 돌릴 시간이 주어졌다. 지난 밤 부족한 잠을 메꾸려 어디 처박혀 졸고 싶었다. 하늘 정원에 만들어 놓은 이글루로 들어갔다. 가을볕을 받으며 졸고 나면 정 상무가 복귀할 것이다. 아침 회의 시간 내내 있었던 모든 것을 챙길 것이다.
사장이 말한 것에 대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 우리가 발표한 내용에 대한 사장의 코멘트와 향후 전개 계획, 다른 회의 참석자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이야기들, 자신이 멍 때리고 앉았다가 불현듯 생각난 일까지. 회의를 두 시간 하고 오면, 그 내용을 전달하고 설명하고 우리 업무에 반영하기 위한 회의를 두 시간 하는 것이 정 상무의 특기였다. 오후의 상황에 미리 지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분이 또 오셨다. 권새록 팀장.
"오후에 박 전무님 온다는 말 들었지요?"
"......"
"마케팅 본부장님 말입니다. 오늘 회의 끝나고 정상무 님이랑 같이 오신답니다. 마케팅 본부 팀장 전원 참석하라고 했으니, 팀장들은 이미 출발했을 테고"
"왜요?. 이미 디자인팀 미팅까지 해서 정리할 건 다 정리한 것 같은데..."
"김 부장님이 협박했어요. 한 번도 안 온 거 회장님께 이른다고. 아님 회의 중에 사장님이 한번 가보라고 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오늘 회의는 정 상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간 모양이에요. 민대리 노고 덕분에"
권 팀장이 눈을 찡긋했다. 그녀가 그럴 때마다 깜짝 놀란다. 너무 매력적이라 반한다고 할까.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온다면 분명 또 새로운 일이 생긴다는 뜻. 이번 주말도 pc와 문서 더미에 처박혀 버릴 것 같았다. 그래 잠시나마 주말에 하늘을 날 수 있으리란 꿈을 꾼 것이 오버였지. 성원의 꿈은 닫혔다.
"내가 온 목적을 잊고 있었군. 내려가서 김 부장님께 우리 영상 보고하고 끝내자고요. 어쨌든 오늘은 금요일,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결정할 것 결정합시다. 야근 없이 퇴근하고 주말에 잘 쉽시다."
"예. 팀장님의 휴일을 제가 보장해야죠. 송안점을 위해 이렇게 애쓰시는데"
성원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심으로 송안점 행사를 돕고 있는 권팀장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았다. 지난 한 달, 드림 백화점에 민성원이라는 훌륭한 직원이 생겼다면, 성원은 권 새록이라는 참된 멘토를 얻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상대가 동의할지 모르고 멘토라 하기에는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고 낯간지럽긴 했다.
다시 텐션을 올리는 권팀장을 따라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 부장도 마케팅 본부장 방문 통보를 받고, 팀원들을 불러 모아 업무를 챙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눈짓으로 불러 회의테이블에 앉혔다. 권 팀장이 준비해 온 광고 동영상을 모두 둘러보고 몇 가지 질문이 오간 뒤 점장과 본부장이 오면 바로 보고하고 송출하기로 했다. 그동안 결정했던 일에 대해 한번 더 확인하고 김 부장 나름대로 본부장과 협의할 거리를 만들었다.
"팀장님, 이제 복습 그만하고 밥이나 먹죠. 오랜만에 팀원들 다 모였는데, 한 번 쏘시죠."
권 팀장이 맥을 끊었다. 아니 팀원들의 맥을 살렸다. 흐름을 잃고 잠시 숨을 고르던 김 부장도 자연스럽게 한 스텝 뒤로 물러났다. 황인아가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식당에 연락했다.
"9층 식당가, 비빔밥 집에 자리 많이 있답니다. 가시죠.. 모두."
직원들이 두런두런 자료를 챙기며 일어섰다. 김 부장도 마지못해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맨 뒤에 남아 펼쳐진 노트북을 정리하던 성원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김 부장을 항상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권 팀장만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만 통하는 어떤 주파수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비밤밥 많이 먹으면 졸릴 텐데.." 김 부장이 웅얼거리는 소리는 성원에게만 들렸다. 다시 빙긋 웃었다.
박전무는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사장이나 정상무가 작은 체구라 드림 백화점은 땅땅한 사람을 선호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키가 큰 편인 김 부장이 승진하지 못한다고 의심했다. 그런데 박 전무의 경우 키는 김 부장과 비슷한데 골격은 더 컸다. 김 부장이 날렵한 운동선수 체형이라면 박 전무는 시베리아 사냥꾼 체형이었다. 몇 시간이고 버티고 서서 호랑이를 바라보고 있을 사람. 그 눈빛이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을 향했다.
"자네가 민성원 대리입니까. 오늘 아침 자료가 훌륭하다고 했더니 정 상무가 엄청 칭찬합디다. 김 부장은 좋겠어요. 이런 재원을 데리고 있어서. 지난번 영상 광고 건도 다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 권팀장 시안도 좋고"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튀며 직원들을 돌려 치고 있었다. 교차하며 한 방씩 맞은 팀장들은 다음 습격에 대비했다. 문화센터 박팀장이 방패를 들고 선수를 쳤다.
"문화센터 회원 모집 준비도 끝났습니다. 월요일부터 접수 들어가겠습니다. 다만 기존 골드백화점 회원들이 드림 백화점 회원으로 전환이 안되어서, 접수 시에 약간의 혼란이 예상되는 바, 개인정보 동의 문제로....."
"문제없도록 미리 준비하세요. 약간의 혼란도 곤란합니다."
박 전무가 말을 끊자 문화센터 박팀장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문제점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알았다는 시그널만 보낸다. 성원도 이미 알고 있는 문제였다. 관리 시스템은 드림백화점 시스템으로 바꿨지만 회원 정보는 함부로 스위칭할 수 없었다. 문화센터 접수 시에 일일이 그 동의 절차를 거친다면 시간이 길어진다. 그 점을 우려하고 있지만 박전무는 별로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데스크 대기 고객이 늘어나는 것은 점에서 해결할 문제인지 본사 책임이 아니었다. 유명 강사 섭외만 되었다면 본사는 충분히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가야 하니까 회의는 이쯤 하고 , 좀 시간이 이르지만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으면서 소통 하도록 하지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오셨는데 매장은 한 번 보셔야죠.."
"그거야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면서 쭉 보면 되죠. 저녁은 백화점 외부에서 먹고 바로 출발합시다."
다시 대충 정리하고 모두 일어섰다. 긴급하게 백화점 앞 정육 식당을 수배하여 일행이 모두 자리했다. 박전무의 선창으로 송안점의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와 함께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이것이 간단한 식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술잔이 돌면 오늘 야근은 없겠다 생각하며 권팀장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주말인데 저는 여기 남아 일하고 월요일에 출근하겠습니다."
권 팀장은 박전무에게 본인의 주말 계획을 보고했다. 박전무도 특별한 말은 없었다. 그냥 알았다 하고 기사에게 연락해서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두 어잔 더 마시고 마지막 건배 후에 차를 타고 떠났다.
"내일 중요한 골프 약속이 있다고 하네."
김 부장이 혀를 툭툭차며 말했다.
"일요일 도요"
문화센터 박팀장이 말했다. 그녀는 권팀장과 함께 남아 시스템 테스트를 계속할 계획이었다.
"역시. 그렇게 바쁜데 우리 점에 방문해 주셨으니 감사해야지. 다행히 일도 많이 안 생기고"
성원이 옆에 선 인아에게 말했다. 누가 올 때마다 새로 일이 생겼던 것에 비하면 수월한 회의였다. 더구나 마케팅 본부장의 방문에 밀려 정 규식 상무의 회의가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점장 정 상무는 또 어떤 일을 벌일까 궁리 중일 텐데...
이번 주말에는 깔끔히 정리해야지. 오픈 전에 할 일들.
금요일 삼시 세끼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