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밤이 그렇게 지났다. 저녁에 방문한 본사 디자인팀 직원들과 허겁지겁 미팅했다. 김 부장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나씩 체크해 나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각보단 꽤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미 발주 나간 것도 있고 주말에 작업할 싸인물도 완성도가 있어 보였다. 다시 한번 조직의 힘을 느꼈다. 나름 전문가 집단이라고,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 필요한 것과 나중에 할 것으로 정리해 왔다. 아쉽지만 오픈에는 지장이 없겠다는 판단에 약간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퇴근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 출근하기를 기다린듯 바로 점장실로 불려 갔다. 이미 김 부장을 비롯한 팀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성원은 다소 부은 얼굴에 머리만 대충 손으로 빗어 넘기고 회의테이블 말석에 자리했다. 팀장들의 얼굴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루 하루를 전쟁처럼 보내고 있는 직원들에게 끝없이 할 일을 만들어주는 정 상무의 재주는 정말 당할 자가 없다.
"일단, 내일 아침 본사 회의 시간에, 우리 오픈 준비 현황을 간단하게...... 모 한 20분 정도 브리핑할 테니까. 김 부장팀에서 종합 정리해서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봐. 사장님 안심하고, 다른 점장들이 놀라서 아무 소리 못하게 섹시하게 정리해 줘요. 그래픽도 좀 넣고, 숫자도 좀 뻥튀기하고.... 일단 목차를 정리해 보면, 추진 경과와 일정 간단하게 넣고, 고객 특성 및 현황, 점포 콘셉트와 운영 전략, 그리고 MD의 강약점, 판촉 계획, 광고/홍보 계획, 직원 캠페인 계획 다 때려 넣고.. 아.. 오픈 세리머니 계획은 별첨으로. 거 모야... 테이프 커팅 때 도열 도면까지. 그건 회장님도 보고해야 하니까....."
끝없이 이어진다. 그걸 오늘 하루에 만들라고. 아니 자기가 미리 보고 연습해야 하니까. 오후 3시까지 만들라고. 어이가 없어 한숨도 안 나왔다. 명목상으론 김 부장에게 지시하고 있지만 성원을 배석시킨 이유는 뻔하다. 성원이 만들고, 김 부장이 감수하고, 점장이 최종 확인하겠다는 것.
"있는 자료들 취합 정리하는 것이니. 뭐 어렵지는 않겠네요. 우리 민대리가 또 속도가 워낙 빠르지 않습니까. 본인 스타일대로 핵심을 섹시하게 잘 뽑기도 하고."
김 부장이 맞장구를 친다. 성원은 머리가 아프다. 있는 자료라고. 그런 것은 없다. 회의 발표자료라고 말한 순간, 여기 모인 모든 팀장들은 각자 자기 팀 자료를 새로 구상하고 있다. 각 팀에서 내놓을 기초 자료를 다시 만들어 성원의 손에 모으기에도 부족한 한 나절만에 그것을 만들라고. 본사 회의가 금요일인 것을 왜 이제 말하냐고. 오늘은 목요일인데. 담배 하나 피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텅 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일단 드림백화점 공용문서용 템플릿을 띄웠다. 회사 로고를 바탕으로 깔끔한 화면 분할,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를 기본으로 한다. 여기다가 엑셀 문서를 그대로 잘라서 붙여?. 불가능하다. 도표는 깨지고 전환은 느리고, 글자는 보이지도 않겠지. 한 장 한 장 공들여 새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 괜히 출근했다. 월차 내고 잠수 타거나 영상 광고 편집실에 외근 간다고 할 것을. 그러면 누군가 다른 직원이 할 텐데.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원망스럽다. 일은 혼자 하는데 왜 우리가 팀인지. 멀리 김 부장 자리를 보니. 세리머니 도면만 바라보고 있다. 회장님과 사장님 자리, 시장과 국회의원, 고객과 협력사, 각종 단체 대표까지 명단을 늘어놓고 도면 배치 중이다. 성원이 보기에 일주일째 그 일만 하는 것 같다.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을. 회장님을 기준으로 시장이 왼쪽인가요. 오른쪽인가요?
"모 작지만 특별한 것 없을까? 우리만 하는 거"
김밥을 우걱거리며 정 상무가 묻는다. 그런 게 있으면 자료에 반영했지 이렣게 나머지 공부하듯 무릎을 맞대고 구박받고 있을까 싶어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민대리. 그렇게 눈 크게 뜨고 노려보면 무섭다니까. 생각 좀 해보자고, 늘 하는 것. 오픈 점포면 다 하는 것 말고. 우리만 하는 것, 새로 하는 것. 우리 드림백화점이 또 최초, 최대 이런 것 좋아하니까."
아이디어 하나 보태지 않고, 성원이 작성한 자료 그대로 들고 온 김 부장도 옆에서 거든다. 이럴 땐 정말 밉다. 알 수 없는 사람. 실수 없도록 챙기고 체크하는 것은 잘 하지만, 거기까지. 스스로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할 일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계속 일을 만드는 정 상무와 대조적이다. 어쩌면 정 상무가 벌이는 일을 따라가며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김 부장에게는 벅찬 건가. 성원이 딴생각으로 빠져들려 하는데 다시 정 상무가 입을 뗀다.
"옛날에 거북이 마라톤이라고 있었지. 기억나나.."
"요즘도 합니다. 남산 자락길 걷기 같은 것. 가족이랑 연인이랑 손잡고 걷는 거..."
"날씨도 좋은데. 그거나 한번 하지. 10월의 마지막 날, 송안 호수 걷기."
"그걸 하자고요. 준비 시간도 있는데..."
"지난번, 경로잔치도 잘했는데, 우리 김 부장한테 그 정도는 껌이지.. 안 그래. 오픈 행사 기간에 접수받고 협력사 협찬도 좀 받고, 기념으로 수건 같은 것 만들어서. 우리 백화점 캐릭터 새겨서. 나눠 주고.
모 친환경 캠페인도 좀 하고.. 어디 지역 단체 연계할 데 없나.. 시장 상인회나, 아님 상공회의소. 여긴 지역 언론 같은 것은 없지!"
성원은 포기했다. 정 상무가 하겠다고 말한 순간, 이미 수백 명의 군중이 송안 호수를 걷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다. 일회성으로 끝내면 되니까. 차라리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자료나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싶었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그쪽에 운동하는 분도 많고. 동호회 단체 참여나 학교 봉사활동 이런 것으로 활용하면 사람 모으기도 어렵지 않겠습니다."
"역시 민대리가 젊어서 그런지. 금방 알아 들어. 거기 한 5~6킬로 코스 나오지. 그 정도면 우리같이 배 나온 아저씨들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예. 보물찾기 경품이나, 버스킹 공연도 하고, 안전 요원들 잘 배치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일단, 자료에 넣어. 나중에 어려우면 공원관리소 핑계대면 되니까. 한눈에 이해되게 사진도 좀 찾아 넣고"
"아.. 그러고.. 날씨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마스크 준비한다고 하죠. 요즘 미세먼지가 가을에 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비 오면 우비 나눠주고, 미세먼지 오면 마스크 나눠주고. 항상 철저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있어야 사장님도 저희들 진심을 인정하시죠."
김 부장이 겨우 하나 거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아이템을 추가하고 끝내려 하는데, 정 상무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나가서 자료 수정할 생각으로 마음이 급한 성원을 다시 쳐다본다. 두렵다.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벌써 지친다. 김 부장까지 나서면 정리할 일이 아득하다.
"아까. 민대리가 말한 동호회. 그거."
"예. 송안 호수에 가면 그런 분들 많이 봅니다. 무슨 모임 같은 거 하시는 분 들. 모임 목적은 다르겠지지만 친목을 위해 산책하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것이 진짜 목적이죠."
말을 하면서 김세안과 함께 했던 스카이다이빙 동호회를 떠올렸다. 그 사람들은 친목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훈련받는 군인들처럼 정해진 시간에 나와서 비행기 타고 낙하산 타고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것이 요즘 동호회인가. 우리 송안 사람들만 아직도 순박한 건가.
"그래. 그런 동호회를 우리 문화센터랑 연결하면, 회원 모집이 좀 수월하지 않겠어. 강좌를 만들고 사람을 모으는 게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원하는 강좌를 만들고, 친목을 위한 장소를 빌려주고, 음식값도 좀 깎아주고."
'가족 농장 같은 것을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요. 꼭 가족이 아니어도 친목 모임별로 호수 주변에 와서 상추도 심고 고기도 구워 먹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백화점에 충성도를 높이는 거죠."
갑자기 김 부장의 말문이 트였다. 정 상무의 아이디어에 더하기를 해 나가고 있다. 정 상무는 이미 땅을 알아보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문화센터 콘텐츠로 가족 농장을 한다니, 놀라운 지역 특화 아이디어라고 스스로 감탄했다. 이젠 성원이 뜯어말려서라도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료는 더 늦어지고, 회의자료 안 보낸다고 핀잔 듣는 것은 성원의 몫이다. 두 아저씨의 끝없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쳤는데 정리해서 보고하고 본사에 보내고 확인하고, 그런 일들이 언제 끝날지. 여기서 자료 만드는 사람이나 본사에서 자료 기다리는 사람이나 대리들만 서러운 회사 생활.
"그건 내년 봄학기 기획할 때 하시고, 오늘 자료는 거북이 마라톤까지만 하겠습니다."
성원은 선언하듯 말했다. 미리 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료 볼 때 딴소리 할 것이다. 본사에서 자료 독촉이 심하다고 둘러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성원이 나가든 말든 두 사람은 가족 농장에 얽힌 자기만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김밥을 먹어대고 있었다. 떡볶이나 어묵 국물이 없어 아쉽다는 소리를 해가면서.
그렇게 또 하루가, 밤이 타들어간다. 도망가고 싶고 지치기도 하지만, 한장 한장 만들어지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이게 진짜 백화점인가. 새로운 백화점의 모습을 내가 만들고 있는 건가 착각한다. 지난 번 골드백화점 장기 전략을 만들때도 그런 착각과 환상을 경험했으면서도. 또 비슷한 성취감을 가지려는 스스로를 비웃는다. 어차피 이것은 내 것이 아니지. 정리하는 사람일 뿐. 그냥 빨리 끝내고 쉬는게 최고야. 내일 회의에서 점장이 광내면 그만이지. 지치지 말고 덤덤하게 하자 다짐했다.
그럼에도 성원의 마음에서 한가지 작은 상상이 타올랐다. 아빠의 농장과 그 시절의 아지트. 거기다 가족 농장을 만들면 좋을텐데.송안 사람들이 거기 모여 북적거리면 아빠도 기쁠텐데. 백화점 업무 핑계대고 자주 가볼 수도 있고. 지금은 그 땅의 주인이 된 김세안이 떠 올랐다. 한 번 말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