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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20. 2024

만남은 계속된다.

하늘 정원

   "그렇다고 그렇게 화만 내실게 아니라......."

   전화가 끊겼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이유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그렇지. 모든 것이 제 맘대로 돌아갈 순 없지. 김 세안은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시청 광장 로터리를 차량들이 빠르게 흐른다. 그 흐름이 멈추는 곳은 건너편 백화점. 평일치곤 차량이 많이 몰려 있다. 항상 휴점 다음날은 다른 화요일보다 손님이 많다. 매일 와야 하는데 하루 쉰 것이 아깝다는 듯......

   

   백화점을 팔자 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계에 다다른 영업력에도 불구하고 환경 개선을 위 어쩔 수 없는 투자에 지쳐 있었다. 이미 대기업의 다점포 전략에 무너진 향토 기업을 끌고 가기에는 역전 가능성도 없었다.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조만간 문 닫아야 할 가게였다. 버텨보겠다고 고집부리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내세운 카드가 고용 승계였다. 드림 쪽에서 너무 순순히 요구를 들어줄 때 세안은 뭔가 찝찝했다.

   

   경험이 문제였다. 다양한 M&A 경험이 있는 드림과의 협상 과정에서 빠뜨린 게 너무 많았다. 시간을 끌고

디테일한 요구 조건을 정리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그런대로 성공한 협상이었다. 충분한 자산 가치로 매각 대금도 제대로 받았고 고용 승계라는 명분도 챙겼다. 일단 승계 후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지 협상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를 가지고 아버지가 시비를 걸어도 얻을 것은 없다. 이미 버스는 떠났고 함께 내린 직원들은 아버지의 짐만 되고 있다. 오히려 버스에 남았다가 나중에 내린 직원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또한 잘 버티고 있는 직원도 있지 않은가. 민성원 대리처럼.

  

   어제는 농장의 아지트 주변에 설치해 놓은 CC-TV를 통해 민대리 일행이 소풍 가는 모습을 보았다. 달려가서 난방 온도도 체크해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다. 안 가는 게 맞는 것이지. 화면 속에서 즐겁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으로 만족했다. 모처럼의 휴일을 건강하게 즐기는 것을 보는 것만로도 대견했다. 그렇게 잘 버티는 직원들도 있는데. 조금 힘들다고 불이익이 있다고 회사를 떠나 버리는 직원들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낼 이유는 없다. 물론 드림 쪽의 무례한 요구처럼 찾아가서 축하하고 단골 고객들을 인수 인계할 이유도 없다. 분명히 드림 회장의 과한 요구였다. 나쁜 놈들. 교활한 자들......


   아버지가 들이닥치기 전에 사무실을 나왔다. 고릴라 PC방으로 향했다. 맥주나 한잔 사라고 강덕출을 다그쳤다. 외출할 계획이 있다고 반항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비해 스무 배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또출! 데이트라도 있나?"

"어허.. 직원들 듣는데.. 또출이 뭐야... 나도 사장이라고 사장끼리 예의 좀 지킵시다."

"아.. 예.. 강 또출 사장님. 어디선가 무슨 일만 벌어지면 또 강덕출이가 있다.. 해서 또출이란 것. 이 동네 사람은 다  아는데. 저 직원들은 어디 타지에서 뽑아왔냐."

"알았다고.. 같이 가자고.. 맥주 사줄게.. 미리 연락도 안 하고 나타나서는. 생떼나 부리지 마"

"가도 되나.. 방해되는 거 아냐" 세안이 슬쩍 물러섰다.

"그래, 그럼 같이 갈만 한 자리니까 괜찮아. 키틀리 만나러 갈 거니까. 가서 말은 하지 말고 맥주만 마셔.."

"키틀리?"

"너의 키이라 나이틀리. 뭐 부탁할 일이 있다고 황인아하고 같이 오기로 했어"

"내가 그 이야기도 했었냐. 닮았다고. 언제 그런 말을 했지. 기억 안 나는데..."

"직접 한 것은 아니고, 너 미국에 있을 때, 메신저인가 블로그인가 어디에 쓰여 있었어. 영화를 보다가 그 아이가 떠올랐다고. 닮았다고. 그 아이가 누군지는 안 썼지만 내가 누구냐. 당장 눈치챘지. 농장 소녀를 그리워하는 서핑 보이의 마음을......"

  그랬던 날이 있었겠지.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맥주를 먹고 그날의 마음을 줄줄이 써 내려갔던 날. 단 한 명 있는 독자가 읽고 있다는 느낌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썼겠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지우지도 못한다.

흐흐거리며 따라나섰다. 덕출이 누구를 만나든 나는 맥주를 마시러 온 것뿐. 그들은 일 이야기를 하고 나는 맥주를 마시면 그것뿐...


 "그래. 오빠는 또출이고 부사장님은 별명이 뭐였어요?"

 인아가 오빠 소리를 이렇게 잘하는 아이인 줄 몰랐다. 김세안의 느닷없는 출현에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두 사람의 옛이야기로 흘렀다. 특히 황인아는 열일곱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성원을 위해서도 더 많은 정보를 캐내겠다는 속셈을 내비치며 두 사람에게 끊임없이 추억을 강요했다.


"얘는 세빙, 좀 격하게 발음하면 새삥... 맨 날 좋은 물건, 새 물건만 썼거든.."

"어울리네요. 좀 옛날 말 같진 하지만.. 사람도 허여멀건 해서... 아. 지금은 아니고 그때 그랬었다는 거죠"

인아가 계속 말을 받아주자 강덕출의 무용담은 끝없이 이어졌다. 김세안은 맥주만 계속 들이켜고 있었다. 맥주 먹으러 왔다고 말하더니 그것이 진심임을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성원은 뭐라도 말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15년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을 바라는 눈길로 세안을 향해 말했다.


"어제는 부사장님 덕분에 소풍 잘 다녀왔습니다."  

"그.. 부사장님이라 하지 말라고요.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맥주 두병을 혼자 마시고 이 사람이 취한 것 같았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아와 덕출도 있는데 갑자기 방어막을 내려놓고 덤벼들었다. 형이라고 부르라니. 한 번도 합의한 적 없는 호칭이었다.


"엑... 그런 사이예요. 부사장님. 대리와 형님 동생하사이. 그래서 낙하산도 같이 타러 가고, 아지트도 빌려 주고.. 오늘 여기 온다니까 일부러 만나러 오고. 보고 싶어서"

  인아가 말려들었다. 덕출은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잘 모를 땐 맥주를 마셔야 한다. 앞에 놓인 잔을 들고 한 방에 쓸어 마셨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최근 세안의 행동에 나타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생각했다. 지난주 스카이다이빙을 다녀와서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그동안신경도 안 쓰던 농장의 CC-TV와 보일러 앱의 성능을 테스트했다. 어느 주말인가 밤에 혼자 먹고 적도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 인아가 말하는 상황과 대충 들어맞았다. 그럼 오늘 온 것도 치밀한 계산. 약속을 어떻게 알고.

 

"세빙, 너 오늘 약속 알고 왔지. 그냥 맥주 마시러 온 거 아니지. 누구한테 들었냐. 내가 얘들 만나는 거."

  덕출이 세안을 추궁해 가자 성원은 괜히 민망했다. 세안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 나타났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아가 자꾸 두 사람을 엮으려 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덕출까지 설레발을 칠까 걱정되었다. 다시 한번 화제를 돌려 보았다.


"지난번 추석에 보내 준 고기 잘 먹었다고 엄마가 전하래요."

"아... 그래...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싶어도 일이 바쁘다 보니 맘대로 안되네. 그래도 잘 드셨다니 다행이다."

"뭐. 애가 상상력이 없어 맨날 고기만 보낸다고. 여자 둘이 사는데 고기를 얼마나 먹는다고... 하셨데요."

 인아가 다시 끼어들었다. 상상력 없는 덕출은 목소리가 줄어들며 다음에는 생선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새 맥주 한 병을 더 마신 세안이 자세를 고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성원은 전날 만난 전광판 업체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제안 중에는 백화점과 호텔 건물에도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여 송안 시청 광장을 한국의 타임스퀘어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다. 호텔 대표인 김 세안이 알아도 좋을 정보였다. 그동안 송안시는 옥외 광고에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시청 전광판도 공익 광고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새로 당선된 시장은 좀 더 트렌디한 개선을 지시했다. 시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전광판 광고도 개방하고, 오히려 대형 건물에 더 많은 광고 시설물을 설치하여 밤에도 환한 도시를 만들자 했다. 이미 서울에서는 강남구를 시작으로 대형 전광판 설치 경쟁에 들어갔다는 정보까지 전했다.  


"거 참. 격세지감이군. 타임스퀘어는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되나. 우리 송안시는 관광도시도 아니고, 그 흔한 유명 빵집 하나 없는데. 그냥 호수 하나, 포구 하나. 산업 단지 하나. 그게 다 아닌가. 새마을 운동 시대와 디지털 시대가 공존하는 복합 도시. 근데 시장의 뜻은 그렇고. 백화점 의견은 뭡니까?"

  모처럼 세안이 길게 말했다. 성원은 아직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오늘의 목적은 그런 장기 계획이 아니라 당장 송출할 드림 백화점 CF 영상 촬영 계획을 의논하기 위함이라고 부연했다. 만난 지 거의 한 시간이 다 돼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본론은 쉽게 끝났다. 성원도 인아도 송안 시장 유튜브 채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채널의 운영자가 강덕출이었다. 시장 내 코너별 대표 점포가 소개되고 각종 이벤트와 고객 참여 장기 자랑 같은 것이 콘텐츠였다. 물론 조회수는 기대 이하였다. 백화점 마케팅을 위해 지역 정보를 모아 온 성원도 모를 정도니 그 채널을 찾아볼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래도 그렇게 촬영 경험이 있는 상인들이 있고, 고객들의 반응에 따라 섭외 리스트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재밌다. 어려울 줄 알았던 일이 쉽게 풀릴 때. 그것이 귀인의 도움인가. 성원은 다음 날의 추진 계획을 머릿속으로 점검하며 시원하게 맥주를 한잔 마셨다.


  허여멀건 얼굴에 항상 새 물건을 써서 세빙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이와 사고 있는 곳에는 항상 출몰한다 하여 또출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는 맥주를 거나하게 들이켜고 서로를 놀려댔다. 15년 전 어린 시절의 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성원의 팀장으로 온 이후 3년간 가장 천진하고 무해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어쩜 저 사람의 행복은 이런 단순함인가 생각했다. 지금 저 사람의 즐거움은 어제 아지트에서 인아와 함께 하며 느낀 즐거움과 같은 종류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부사장님 비서!"

 "왜.. 그게 무슨 말인데.."

  한 번 비서는 영원한 비서였다. 그래 두 사람의 카톡 창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야.

  본의 아니게 스파이가 된 전 골드백화점 직원도, 오늘 이 약속을 김 세안에게 귀띔한 사람도 어쩜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역시 재미있었다. 마구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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