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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06. 2024

매일이 새롭다.

하늘정원

    아침 일찍 정상무에게 전광판 광고 업체 미팅 결과를 보고하고 올라온 옥상의 풍경이 새롭다.점장실에 김 부장도 함께 있어 보고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업체 현황과 의견에 성원의 추진 계획까지 더해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보고가 좋았다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그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 광고 담당자들의 질투를 이기고 금주 내로 전광판에 올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본사 광고팀에 컨펌받고 매체 부킹하고 하는 부수적인 절차도 꽤 벅차 보인다. 일단 본사의 백화점 이미지 광고 영상을 쓰지 않고 우리 점포에서 제작하겠다는 것부터 쉽지 않다고 우려했지만 김 부장이 풀어주기로 했다. 일단 만들어보라는 김 부장의 태도가 한편으론 힘이 되었다. 정상무는 내친김에 내년 봄까지 부킹 하라고 했다.그에 맞게 시리즈 광고를 계획해 보라는 지침도 있었다. 보고를 넘어 업무 부담으로 확장되는 와중에 일에 대한 의욕과 부담이 함께 몰려오며 휴점일이었던 어제 하루가 아쉬웠다. 일을 하는데 하루를 손해 본 느낌. 일단 업체에 전화하여 제작과 송출 계획을 통보했다. 대충의 예산과 일정을 합의하고 심란한 마음으로 다시 담배를 한대 물고 보니 풍경이 보였다.

 

    투명 이글루 같은 것이 세 개 생겼다. 플라스틱인지 아크릴인지 둥근 온실 같은 것이 세 개의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성원이 항상 머무는 장소, 바로 앞으로 꽤 높은 무대의 마루가 깔려 있다. 위치나 크기로 봐서 간단한 공연을 위한 무대 같았다. 조금 높이가 있는 것이 계단 필요할 듯 했다. 자세히 보니 중앙에 투스텝 계단이 있다. 걸터앉아보니 그런대로 쓸만했다. 볕 좋은 날에는 여기 걸터앉아 공원을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쌀쌀한 날에는 이글루 안에 들어가 한기를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황량함을 벗어나 배려가 느껴지는 업그레이드였다. 누군가 이것을 계획하고 단 하루 만에 설치를 끝냈다니. 호숫가를 산책하고 아지트에서 노는 동안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VIP 파티까지 꼭 일주일 남았는데 하나씩 준비되는 모습을 보면 흥겹고 성공적인 시간이 될 것이란 기대가 차올랐다.


    어디서 울리는지 모르지만 죽어라 울리던 드릴 소리도 멈췄다. 인테리어와 집기 설치가 마무리되었다. 매장의 먼지도 가라앉고 마지막 정리 중이다. 정상무는 아침부터 인테리어 하자와 매장 보완 공사 체크리스트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업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체크하고 있다. 실제 보완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체크리스트 보고를 위함인지 그들의 마음도 분주했다. 모든 칸막이를 걷어낸 매장을 둘러보고 올라온 옥상마저도 이렇게 작은 변화가 새로운 기대를 만들게 한다.


 "백화점이란 게 그런 곳이죠. 익숙한데 새로운 곳."

   언제 왔는지 권새록 팀장이 말했다. 이런 등장에 익숙해져서 성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권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익숙해지면 자주 오긴 하죠.그렇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기대가 없다면 재미없지요. 지치기만 하고"

 "어린 왕자와 여우의 관계인가요. 길들이는 과정."

 "뭐 갖다 붙이면 다 붙는 거죠."

 "근데. 탐장님은 저를 감시하고 계세요. 항상 이 대목에서 나타나시니?"

 "내가 민대리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거죠. 항상 여기를 어떻게 바꿀까 뭘로 꾸밀까 궁리하다 보니 자주 오게 되고, 가끔 민대리와 시간이 겹치는 것이지 민대리를 따라오는 게 아니어요. 그건 그렇고 와인은 잘 마셨나요?. 아침에 황인아 씨가 나한테 걸렸거든요"


   민망한 일이었다. 와인이 많아 아무도 모를 거라 하더니 인아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권팀장의 머리 속장부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다니. 어떤 표정으로 빠져나가지. 업무용 샘플을 마음대로 들고나간 것은 무조건 잘못이라고 빌어요 하나. 아니면 개인 비용으로 변상할 계획이었다고 행정적으로 말해야 하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렸다.

 

 "와인이 너무 좋아서 팀장님 생각이 났어요. 모처럼의 휴일인데 같이 계셨으면 좋겠다. 저희들은 소풍을 즐기는데 탐장님만 회사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계신 것이 죄송하기도 하고. 와인이 맛있을수록 죄송한 마음이 커져 갔습니다."

  "후후. 민대리 답지 않게.아부도 아니고. 하여간 나중에 파티 정산할 테 와인 값은 따로 청구할 겁니다."

  "아니. 진짜입니다. 팀장님이 보고 싶었다고요. 지금도 여기 이렇게 바뀐 것을  보면서 혹시 어제 오셨으면 저녁에라도 같이 할 걸 그랬다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만 그만, 자꾸 그러면 내가 믿게 돼요. 그런 사람들이 셋이 있으면서 톡하나 안 남기고. 나는 어제 여기 공사 확인하고 저녁에 쓸쓸히 혼자 라면 먹으러 갔구먼. 두고 봅시다. 내가 어떻게 복수하나."


  성원은 다시 권새록 팀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미소 띤 얼굴에 복수 따위의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뭔가 광채가 흐르는 듯한 그의 얼굴 뒤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대한 즐거움이 흘렀다. 이를 눈치챈 성원도 재빨리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 근데, 어떻게 여기다 무대를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이게 평소에는 이 위에 돗자리 깔고 놀아도 될 것 같고. 아주 다용도로 쓰이겠는데요."

  "내가 숨은 용도를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거기 무대 뒤편을 열어보세요"

  권팀장의 말에 무대 뒤편을 보니, 작은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당기자 벽이 열리면서 무대 밑으로 서랍이 열리는 듯한 공간이 나타났다. 비록 작지만 소품들이나 청소용품 정도는 보관할 만했다.

 "거기에 보물을 숨겨두면 편하겠지요. 무대이면서 벤치이면서 수납공간, 나름 다목적으로 만들었지요. 민대리 재떨이도 숨기고. 종이컵 그만 버리고"

  권팀장의 섬세한 관찰력에 놀라곤 한다. 직원 흡연실에 가기 싫어 옥상 반대편으로 올라오는 성원은 올 때마다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와서 재떨이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하게 커피를 많이 마신다고 자책하던 날도 있었는데.


 "팀장님! 어떻게 그런 것이 보이나요. 제가 종이컵 쓰는 것. 열 병이 넘는 와인 중에 하나가 사라진 것. 누가 옥상에 다녀간 것. 그런 것들을 다 보고 기억하시다니. 솔직히 경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팀장님이나 저나...."

말하다 보니 애매해서 말꼬리가 흐려졌다. 더 나가는 것은 무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 말 할라 그랬죠. 우리 두 살 차이예요. 내가 일찍 출세해서 민대리가 약 오르면 미안해요. 나도 민 대리처럼 낙하산으로 입사했는데, 우리 둘의 차이가 그거예요. 낙하산 탈 때 연봉보다는 2년마다 승진을 조건으로 걸었거든요. 민대리는 그런 조건 없었죠. 어차피 특채인데 협상을 했어야 하는데."

  

   알수록 묘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비밀이라면 비밀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라 몰라도 되는 건데 벌컥 말하는 이유가 뭘까. 그 정도로 내적 친밀도가 차오른 걸까. 그냥 좀 친해보고 싶은 상사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생각은 없었는데, 더구나 권팀장이 성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또 그것을 서슴없이 말하는 태도도 그렇고. 오히려 그녀의 진짜 정체가 궁금해졌다.


   "근데.. 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특채인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나름 대외비 인사 정보 아닌가요. 혹시 황인아가 떠들고 다녔나요. 하긴 골드 직원들은 많이 알고 있긴 했으니."

  말하다 수긍했다. 어차피 골드 직원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 대부분이 특채였다. 공채 직원도 별로 없었고 그마저도 몇 년 전부터 뽑지 않았다. 전문성이 필요한 몇 개 직종만 별도로 공개 채용했지 일반직을 공채로 뽑기에는 기존 직원들이 너무 많았다. 권팀장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한 들 그렇게 놀랄 일이거나 예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말이 많았네. 그냥 민대리가 궁금한 것만 알려주면 되는데. 난 원래 디자이너 출신이에요. 미술 공부하고 유학 가서 디자인 전공하고 드림에 특채로 입사했지요. 처음 입사해서 vip 제도 관련 제작물이나 행사 연출 그런 것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말을 많이 했더니. 지금 자리로 옮겨보자는 권유가 있어 냉큼 잡았어요."


"그럼 혹시. 광고팀하고도 잘 통하세요. 제가 영상 광고 만들어야 하는데."

"내 주 전공이 영상 연출이에요. 비디오 아트도 하고. 입사 초에 광고팀에 있었고. 뭘 도와줄까요."


   매장과 행사만 매일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도 매일 새로울 수 있었다. 여기 있는 권새록 팀장은 지난 주까지 알던 VIP관리팀장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영상 제작에 도움을 주고 광고팀과 다리를 놓아줄 귀인이었다. 새로운 미션이 생길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주는 사람을 무엇이리고 해야 하나. 어떻게 이런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업무 중심으로 흘렀다. 전광판에 광고하고 싶다는 정상무의 느닷없는 지시부터 오늘 보고 후에 할 일에 대한 고민까지 단숨에 털어놓았다. 순순히 듣고 난 권 팀장은 숨을 돌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성원도 업체에 전화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단계 나가고 나서 다시 권팀장의 이야기 궁금했다. 뭔가 더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알았다는 듯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디자이너 출신이라 그런지 일하는 방법이 좀 달라요. 김부장님이나 민대리는 기승전결로 일하잖아요. 왜 이 일을 해야하는가 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잘하냐 까지. 그러니까 설계하고 정보를 모으는 것이랄까. 물론 목표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똑 같은 것이고

  근데 나는 그냥 목표 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마구 마구 모아요. 그리고 그것을 늘어놓고 사진찍듯 기억하는 것이죠. 그담에 설계해요. 초기에 수집된 정보들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붙는 거죠. 그래서 재미있어요. 그 일이 내 머릿 속 그림대로 되어가는 것이..."


  반쯤 알아들었다.하나는 확실했다. 이번 일도 잘 되리라는 자신감이란 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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