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침은 분주하다. 맥주를 마신 다음 날은 더 분주하다. 기분 좋은 밤의 끝에는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있다.
출근하자 바로 불려 간 김 부장 앞에는 낯선 인물이 있었다. 본사 광고팀장이라 밝힌 그 자는 바로 성원이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본사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영상광고를 만들고 시청 옥외 광고판에 상영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그 문제라면 김부장이 조율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들이닥친 것을 보니 뭔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 하지. 강 팀장. 민대리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네.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당신이 이렇게 아침부터 나타나서 꼬장 부릴 일이 아니라고."
"저도 어제 통화할 때까지는 부장님이 순서에 입각해서 일을 처리하실 줄 알았죠. 근데 이미 결론이 다 난 것처럼. 저희 전무님께 말씁하셨다고. 제가 본부장실에 불려 가서..."
"그리니까. 당신이 당신 본부장한테 깨진 일을 왜 여기 와서 난리냐고. 내가 하겠다는데. 우리 송안점 오픈하는데, 오픈 축하 광고하나 내 맘대로 못하냐고. 너희 본사 광고팀이 그렇게 잘하면 뭔가 만들어와야 할 것 아니야. 이제 오픈 일주일 남았다고. 근데 너희들 해놓은 게 뭐 있어. 이거 송안점 오픈 광고 계획!"
김 부장이 흔들어 대고 있는 문서, 즉 송안점 오픈 광고 계획은 성원도 이미 본 적이 있다. 간단한 오픈 캠페인 콘셉트와 매체 부킹 계획뿐이었다. 송안점에서 궁금해하는 광고 콘텐츠나 캠페인 디자인 같은 것들은 아직 전달된 바가 없다. 그래서 김 부장도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본사의 태평함에...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너희 마케팅 본부에서 송안점 오픈 준비에 해준 게 뭐 있어. 막말로 마케팅 본부장이라는 그 인간. 현장에 한 번 온 적이라도 있냐. 회장님, 사장님 다 다녀가셨는데. 너네 박전무만 한 번도 안 왔어. 마케팅 본부장이 그렣게 높은 자리야. 상품본부장은 거의 매일 와서 브랜드 한 개라도 더 유치하려고 애쓰고, 영업팀 직원들 독려하는데. 너네 마케팅 본부는 그동안 내가 오라고 오라고 해서 vip관리 권팀장하고 문화센터 말고 와 본 사람 있냐고. 강팀장. 너도 이번 일 아니면 안 왔을 것 아냐. 본사에 앉아서 그 잘난 인스타나 올리고, 유튜브나 돌리고 있었겠지."
김 부장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픈이 가까워지면서 처음 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 기세등등하게 본사의 방침이며 원칙을 이야기하던 광고팀장의 얼굴은 잘 익어가는 고구마처럼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김 부장이 선제공격을 하며 분쇄했다. 그는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왕 왔으니 점장님께 인사나 하고 가. 로컬 광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돈 쓰고 폼 잡는 것 니들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박전무한테도 전해. 민대리 점장실로 안내해"
툴툴거리는 김 부장을 남겨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광고팀장이 점장실에 가기 전에 숨 좀 돌리자고 해서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담배 하나를 물고 이번에는 그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자기도 영상물 콘티랑 다 봤고, 권 팀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들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마케팅 본부장이 갑자기 불러서 본사 컨펌 없이 일개 점에서 진행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중단시키라고 지시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새벽부터 달려왔는데 말 한마디 못 붙이고 김부장에게 당하니 힘들디고. 오히려 성원이 그를 위로하게 되었다. 안정의 시간을 보내고 점장실로 가려는데 그가 다시 성원의 소매를 잡았다.
"정 상무님은 담배 냄새 싫어하시는데, 가글이라도 해야 하는데.."
성원은 한 번도 안 해 본 걱정이었다. 항상 주의하긴 하지만 정 상무가 담배 냄새에 대해 민감하다 느낀적은 없었다.
광고팀장을 직원 화장실로 안내하며 다시 팁을 주었다. 잠시 후에 영업팀 회의가 있어서 정상무와는 말 그대로 인사만 하게 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것이 문제였다. 광고팀장의 방문 목적을 오해한 정상무가 함께 회의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는 아무 말 못 하고 회의실로 끌려갔다.
"자!. 우리가 오늘 MD 개편 완료 회의를 한다고 하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영업을 운영하고 브랜드를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본사 광고팀장도 함께 참석하셨으니, 각 팀장은 매장 공사 관련 후속 조치 계획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광고, 홍보 방향성도 적극적으로 건의해 보도록 합시다"
"짧은 시간이지만 상품본부와 영업팀이 노력해서 50개 이상 브랜드가 새로 입점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번에 입점한 브랜드가 장사가 잘 되어야 앞으로 더 좋은 브랜드, 해외 명품 브랜드 유치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육성브랜드를 그룹화해서 따로 관리하겠습니다. 해당 브랜드의 목표와 프로모션 계획을 여기 있는 민성원 대리에게 별도로 제출하시고 민 대리를 중심으로 각 팀 담당자들이 함께 하겠습니다."
김 부장이 준엄한 표정으로 성원에게 일거리를 던졌다. 이후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용 부분에 대한 하자 보수 계획과 오픈 행사 안전 대책부터 새로 입점한 브랜드의 매니저 자질 문제, 퇴점 브랜드의 고정 고객을 승계하는 방안까지 폭넓게 논의가 진전되었다.
회의 중간중간 광고 팀장을 쳐다보면 그는 뭔가 열심히 수첩에 적고 있었다. 송안점 영업총괄이라는 성원은 별로 적는 게 없는데,
저 사람은 뭐 그렇게 적을게 많을까 회의 끝나고 한번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두 시간 정도 논의가 이어진 후 정 상무가 다 같이 점심이 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며 회의는 끝났다. 이번에도 광고팀장을 챙겨 식당가의 한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공사하느라 수고했다며 특별히 제공하는 바싹 불고기 백반 맛을 거듭 감탄하며 먹고 본사로 돌아갔다.
"마케팅 본부장이란 분이 끝내 승인 안하면 어떡하죠. 영상은 이번 주면 다 되는데요."
"내가 걱정말라고 했지. 오늘 온 광고팀 강팀장이 잘 해결할테니까. 걱정하지말고. 일정 차질없이 준비해."
성원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김부장은 너무나 편안하게 대답했다. 이미 그 문제는 다 끝났다는 듯 다음 과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일단 아까 회의 내용대로 신규 육성브랜드부터 정리해. 무조건 120% 목표 달성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프로모션을 거기 집중하고, 퇴점 브랜드 고정 고객 리스트 만들어서 별도 홍보해.
고객층이 비슷한 브랜드나 기존 매니저 이동 브랜드 이름으로 문자메시지도 보내고. 방문 기념품 같은 것도 준비하고. 그래서 공통 행사에 더해서 브랜드별 이벤트나 프로모션 정리하라고."
"셀럽이나 연예인 초청 행사같은 것도 잘 먹힐텐데요. 아무래도 지방이다 보니..."
"어. 그래.좋은 생각인데. 상품본부 통해서 가능한 많이 초청하자구.마케팅 본부는 돈타령이나 할테니 별 기대말구"
역시 말하면 들어주는 김부장이다. 다만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적당한 양식을 만들어 영업팀에 뿌리고 취합하기로 했다.
이제 일주일 남은 오픈. 모든 캠페인과 행사가 카운트 다운에 돌입했다. 문화센터에서도 확정된 강의 시간표를 가져왔고, VIP 초청 파티는 개별 고객 TM으로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오후에는 전광판 광고 촬영하고 3일내로 편집본이 나올 예정이다. 밤이면 매장은 전쟁터로 변해 방치됐던 재고 상품들을 빼내고 새로운 상품을 채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주말에는 외부 사인 교체가 예정 되어 있다. 30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켜온 골드 백화점 간판이 떨어지고 산뜻한 드림 백화점 간판이 올라간다. 그리고 정문 이마 사인은 흰 천으로 가려 놓을 것이다. 다음 주, 오픈 세레모니와 함께 가림천이 떨어지고 몽글몽글한 드림백화점 로고와 함께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근데 문제는 그것들이 생각만 있고 그림이 없다. 김부장이 아침부터 씩식거린 이유가 거기 있었다.
"다음엔 디자인 팀이지.그 놈들을 타작해야지."
"매장 공사 끝났는데. 매장 안내 키오스크는 언제 설치되냐고. 전기만 뽑아 놓고 물건이 안들어 오고"
전화기를 붙들고 씩씩거리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성원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모습이라 감탄했다.
김 부장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니. 더구나 지금 통화하는 사람은 마케팅 본부장이다. 자기 보다 훨씬 높은 사람에게 저렇게 당당히 어필하고 있다니. 역시 승진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통화를 끝낸 김부장이 팀 전체를 향해 공지했다.
"오늘 밤에 각 분야 디자이너들하고, 작업자들 같이 들어온다니까. 관련있는 사람은 모두 알아서 준비해"
디자인과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은 모두 남아서 오늘 안으로 모든 일을 끝내라는 지시였다. 인테리어 마감에 필요한 것들. 광고에 필요한 것들, 매장 안내와 행사 고지에 필요한 것들. 거기에 오픈 행사에 따른 임시 제작물까지. 사람 눈으로 보는 것은 다 디자인이고. 그것과 관련없는 업무는 없었다.
"또 야근이네. 그래도 우린 권팀장이 미리 챙겨서 라운지 사인이랑 데스크 디자인 그런 것 다 끝났는데. 찻잔이랑 쟁반까지 싹 바꾼 거 알지. 애들 유니폼은 물론이고, 머리끈끼지 체크하더라"
팀장 결재를 위해 사무실에 올라와 있던 인아가 성원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하여간 권팀장 대단해. 그렇게 자기 일 챙기고, 이따가 촬영팀 데리고 오기로 했어. 개인적으로 아는 친구인데, 광고팀에서 쓰는 업체보다 잘 한다고, 특별히 소개해 주기로 했어. 자가가 연출도 한데."
"하여간 그 양반도 힘이 넘쳐. 그럼 그분들 밥이라도 사야겠네. 내가 필요하면 연락해.'
밥을 사라는 건지. 자기가 또 놀고 싶다는 건지. 인아는 그렇게 내려갔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이 오면 바로 송안 시장에 들어가 촬영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밤 늦게 까지 일하고, 시장은 밤에 더 활력이 있다는 덕출의 의견도 그럴 듯 했다. 촬영보다는 편집에 시간이 더 걸리다는 것이 권팀장의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찬 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때, 느닷없는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픈 파티에 어머니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냥 개인 자격으로"
전화를 할까 망설였다.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어제 저녁 인아는 성원이 스파이로 오인 받은 사건까지 이야기했고. 그것이 미안했던 세안이 집에 가서 부모님을 설득했겠지. 문자는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미리 보고하기도 그렇고 그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묻기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