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정원
"어디요?"
"오픈행사 계획 회의 끝나고 나오는 길 입니다만."
핸드폰 너머로 성원의 목소리를 들으니 컨디션은 괜찮아 보였다. 권차장은 조금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옥상 가지 말고 라면먹으러 갑시다. 지금 바로 갈까,아니면 30분 후에"
"아. 시간이 애매한데. 지금 바로 가죠.사무실에 자료만 두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성원이 넘어갔다. 거절이라는 옵션이 있단 생각을 못하고 시간을 택해 버렸다. 성원의 이렇게 맹한 점이 맘에 들었다. 자동차에 짐을 싣고 출발하려다 그래도 라면은 먹어야겠단 생각에 전화했다. 1층 직원 출입구 앞에서성원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밤운전을 싫어하지만 오늘만은 출발이 많이 늦어도 그려려니 했다. 어차피 주말은 쉬고 서울집에는 아무도 없다. 일요일에 밀린 청소와 세탁하고 월요일부터 본사로 출근하면 된다.
저녁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리플리'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성원은 묻지도 않고 해물 라면 두개를 시켰다. 지난 번 김부장과 왔을때 반응으로 봐서 권차장도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해물이 좀 많긴 하다. 해물이 들어가니 국물이 진해지는 군."
"평가하지 말고 그냥 드세요"
"이 라면집도 우리가 인수할까!, 직원 복지 차원에서"
"항상 어디가면 그 가게 살 생각만 하세요. 명분 걸고 견적내면서. 그렇게 눈에 띄는대로 게걸스럽게 먹어
대니 재벌들이 문어발이다 모다 욕을 먹는겁니다."
"재벌 아니고, 기업 집단. 또는 그냥 대기업."
짧은 대화들이 이어졌다. 라면이라면 이골난 권차장에게도 이집 라면은 특별했다. 라면이라기 보다는 얼큰한 해물탕에 사리를 풀어넣은 맛이었다. 계속 국물을 들이켰다. 줄어드는 국물을 바라보며 본론을 말할 타이밍을 노리는데 리플리 여사님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 친구는 첨 보는 사람인데 우리 직원이냐. 아니면 네 친구냐?"
"가게 사러 왔대요."
성원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사님이 눈쌀을 지푸리며 의심스럽게 권차장을 바라보자 순발력으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가게 이름이 왜 리플리죠. 혹시 사장님 알랭들롱 좋아하셨지요.".
"젊은이가 뭘 좀 아네. 그영화 최고였지. 니노 로타의 음악, 지중해, 그의 벗은 상체, 한마디로 삼위 일체의
였지만, 가게는 안 팔아. 누가 이가게를 판데. 백화점이야 김사장이 장사를 못해 팔아먹고 내뺐지만 여기는
내가 장사을 얼마나 잘하는데 이 가게는 송안의 자존심이야.절대 서울 것들한테 넘길 수 없지"
"저런. 이 가게는 포기할테니 민대리를 절 주세요. 민대리라도 데려갈게요"
"웃기지도 않고 노련하지도 않고 재미없는 친구야. 우리 성원이가 좋아할 수 없는 스타일이야. 그래도 진지
하게 제안하고 싶으면 그런 제안은 포구에 커피하우스에나 가서 하시오.거기도 재미없는 사람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은 요즘 자기 딸 어디든 치우고 싶어서 안달이야. 서울로 보내버리겠다고 광고하고 다녀"
여사님의 핀잔에 따라 웃으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앗다. 엄마가 여기와서도 걱정하고 여사님과 상담하고 갔다고 생각하니 아침마다 듣는 잔소리를 새삼 엄마의 진심으로 느껴졌다.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장님은 주방으로 가버리고 다시 후룩후룩 라면 먹는 소리만 남았다. 마지막 국물을 들이키고 나서 성원의 아랫입술에 고춧가루를 발견했지만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지난번 회식하고 민대리 집에 갔을 때, 어머님이 뭐라 안 하셨나?"
"뭐 특별히. 그냥 새록 팀장님이 이쁘다는 것 정도만 말슴하셨습니다."
"내 얘기는 안 하시고. 그날 엄청 유심히 보셨는데, 내가 유일한 남자였고. 듬직하다거나 잘 생겼다라든가 한마디 하실 법도 한데, 일부러 전달 안하는 군. 하긴 항상 나를 무시하고. 라면 한번 먹기도 이렇게 힘이든데."
"제가 왜 차장님을 무시해요? 자꾸 싫어한다 무시한다 그러시니까 김 부장님은 진짜로 알고 차장님한테 잘 하라고 저한테 눈치 주시잖아요.상사가 후배에게 잘해주는거지.말단 대리가 뭘 한다고."
"하하. 민대리가 김승호 부장 눈치를 본다는 걸 누가 믿으라고. 부장님이 민대리 눈치를 보지. 천하 태평, 무골호인 김부장님도 민대리 눈치를 보는데 일개 차장인 저야 오즉하겠나. 하여간 송안점에서 민성원이 젤 높다니까. 점장님도 팀장님도 민대로라면 벌벌 떨던데"
"그만하세요. 계속 그러시면 저 진짜인 줄 알아요."
성원이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얼굴이 다가오자 아랫 입술의 고춧가루가 더 크게 보였다. 할 수 없이 손을 들어 둘째 손가락으로 특 쳐냈다.
"이제 더 이상 민대리를 놀릴수 없게 되었네. 다음 주부터는 본사 츨근이다. 어제 사장님 오셨을 때 복귀
하라고 지시 하셨어. 나의 송안점 파견 근무도 오늘로 끝이고. 민대리 놀리는 것도 끝이고."
"벌써 복귀하신다고요.오픈때까지 안 계시고. 근데 방금 제 얼굴에 뭐가 왔다 간 거죠."
"오픈이야 준비 다됐고. 내 임무는 계약체결과 이행이니까 잔금 주고 등기 끝냈으면 돌아기는 거지. 그래도
송안의 마지막 밤에 민대리랑 라면 먹고 떠나네. 차에 짐 다 실었고 바로 서울로 출발할거야."
"그런게 어딨습니까. 환송주라도 한잔 해야지. 다 오라 할테니까 오늘 한잔하고 내일 출발 하세요.
아직 사무실에 다들 있을테니 소식 들으면 바로 모일겁니다. 일단 어디로 갈까요?"
"다들이라니, 누구?"
"부장님이랑 권팀장이랑 우리 팀원들, 인아랑 현주랑."
"나는 그 팀이 아닌데, 갑자기 왜 불러?"
"아 그렇긴 하지만.가족같이 서로 돕고 일했으니까.떠나는 마음, 보내는 마음은 같을테니 함께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모시고 환송하는 것보다는 "
"츠츠. 김부장님나 권팀장은 내가 한 두해 본 사이도 아니고 이미 낮에 다 얘기했네. 파견복귀 한다고
민대로도 이제 일에 익숙해져야 해. 전국 각 사업소에 있던 직원들이 발령나니까 이틀만에 송안점으로
집결하는 거 봤지. 그게 우리 문화야. 인사 명령 떨어지면 가방들고 가는거야. 인수 인계 그런거 없어.
업무 프로세스가 정해져있으니까 어느 사업소에 가도 바로 적응하고 일하는 거야"
성원을 비롯한 골드 직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아무일도 아닌 듯 말했다.원격지 근무에는 주거비와 교통비도 보조해주고, 가족이 함께 이사할 경우에는 전세자금 전체를 지원해 준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 붙였다. 한 사업소에서 2~3년 정도 근무하고 순환하니까 누구나 지방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설명했다. 송안에서 서울은 차로 2시간도 안걸리니 지방으로 치지도 않는다며 그것이 백화점에서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즉 보기 싫은 놈 있어도 2년만 참으면 서로 다른 사업소로 가니 안보고 살 수 있다. 매년 직원들의 희망근무지를 조사하고 반영해 주기도 하니까 그 기간이 훨신 짧을 수도 있다며 보기 싫은 놈 때문에 퇴사할 일은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엄마 뜻대로 서울로 지원해볼까.
"그래도 차장님이 떠나신다는게 익숙하지 않네요. 새는 알에서 깨서 젤 먼저 보는 놈을 어미로 안다면서요.
제가 젤 먼저 본 드림 직원이 차장님이니까 저한테는 어미새 같았나 봅니다. 왠지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게
될 것 같아요. 먹이를 물어다 목에 넣어주는 어미새처럼. 받아먹으면서 제가 성장하는 동안"
진짜 그랬다. 어쩌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한 번도 없었던 선배를 만난 기분이었다. 처음 하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씩 차분히 프로세스를 짚어주는 권차장에게 아늑함을 느꼈다. 정상무가 급하게 업무 지시를 내릴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서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던 권차장이 떠난다고 하니 섭섭함과 불안이 휩쓸고 지나갔다. 갑자기 아직 못한 일과 해야 할 일에 대한 두려움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