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상쾌했다.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는 김세안의 힘이 느껴졌다.지상 훈련부터 강하의 순간까지 교관의 지시에 따라 피노키오처럼 움직였다. 작은 비행기 안에 동호회 사람들이 밀착 대형으로 앉아 있어 후덥지근하고 퀴퀴한 체로 꽤 오래 대기했다. 강하 사인 등이 들어오는 순간 나간다는 기대가 폭발했다. 두려움에 꼭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송안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체였다. 도심과 아파트 단지가 발아래 펼쳐지며 하나의 큰 그림이 되었다. 저렇게 큰 도시인데 왜 매출은 그 모양이었지. 또 백화점 생각을 했구나 하고 빙글거릴 때 세안이 방향을 돌려 송안댐과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낙하산은 바람을 타고 그쪽으로 쓸려가고 있었다.
"저기 농장 자리 보이나요?"
그가 큰소리로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빰을 쳤다. 아빠의 농장, 지난 3년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닭과 돼지와 함께 보낸 시간들, 직원 숙소와 나만의 아지트, 오늘의 바람은 그 시절 자전거를 타고 수변을 달릴 때 느꼈던 그 냄새와 닮았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경로잔치에 대한 생각. 정말 이런 순간에도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작은 물체들이 점점 커졌다. 땅이 다가왔다.
"착지할 테니 다리를 들어요, 높이."
그의 지시대로 다리를 들어 올리는데 힘이 든다. 코어힘이 부족하다. 운동을 해야겠다. 뭔가 육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세안의 두 팔이 성원을 감싸 들어 올렸다. 지상이다. 두 다리를 내려 땅을 밟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호수옆 억새밭 끝 공터였다. 짧은 시간에 비해 꽤 많이 날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세안이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항상 거기까지다.
"시내로 어떻게 돌아가죠. 여기서."
"정말 민 성원씨 답군요. 대개 이 순간에는 활공의 소감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 그런 게 먼저 하고.
상공에서 본 경치에 대해 와우 한번 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직 타고 온 낙하산도 정리 안 했는데. 시내로
돌아갈 궁리만 하니. 재미 없었어요?"
"그런가. 어쨌든 상쾌하고 좋았어요."
"그게 끝. 좀 더 서정적인 표현은 없습니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던가. 우리 동네가 아름답다든가. 사람이
개미처럼 보였다든가. 영영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든가.너무 순식간이라 아쉽다던가."
세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가 이 정도로 말을 길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얼마나 많은 여자를 안고 탔으면, 그렇게 다양한 소감을 채집하셨어요?"
"오늘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의 낙하산에 묶인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 그동안
한번도 하고 싶지 않았죠"
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처음 성공한 시도에 대한 자축이었다.
동호회 사람들도 순서대로 내려왔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한 것에 대한 감사의 박수를 나누며 해산했다.
"대개 동호회 모임은 어디 가서 뒤풀이하고 그러지 않나요?"
"성원 씨 옛날 사람이구나. 요즘은 그런 거 없어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물론 뜻 맞는 사람끼리
밥도 먹고 술도 먹겠지만 전체 모임이나 자기소개 그런 거 잘 안 해요"
"누가 옛날 사람인지 모르겠다. 인맥 만들고 사진 찍어 과시하려고 동호회 한다는 애들도 많은데."
"그럼 우리는 뜻 맞춰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죠."
"부사장님이 좋은 경험시켜 주셨으니 밥은 제가 살게요."
마을 쪽으로 걸어 나오면서 큰 맘먹고 제안했지만 이미 준비되어 있다며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앞장서서 걷는 넓은 어깨를 바라보니 그때 그소년이라는 인아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저수지가 송안 호수가 되고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개발되면서 도로도 포장되고 넓어졌지만 그 길은 성원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때 그 코스였다. 멀리 아침에 타고 왔던 세안의 승용차가 보였다. 비행하는 동안 누군가 여기로 옮겨놓다니 뭔가 치밀한 계획에 말려 든 느낌이었다. 세안이 차 트렁크를 열고 백팩 하나를 꺼내 둘러메며 말했다.
"우리 라면 끓여 먹어요. 이 근처에서."
"호수 주변에는 취사할 곳이 없을 텐데요. 그냥 제가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어요."
못 들은 척하며 성큼성큼 걷는 데 방향이 이상했다.아니 너무 익숙했다. 농장의 직원 숙소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 가족의 살람집 옆에 별채가 하나 있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삼촌들이 거기 살았는데, 아버지는 그 건물에 서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성원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런데 김세안이 딱 거기로 통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래 되었지만 잘 관리된 아늑함. 마지막 이 방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추울지 몰라 미리 난방을 좀 해두라 했는데 나쁘지 않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둘러보기만 했다. 그냥 작은 책상. 그대로였다. 처음에는 엄청 컸는데 성원이 크면서 작아진 책상이었다. 벽에 걸어 놓은 오빠들의 브로마이드. 역시 그대로였다. 다른 벽면을 차지한 세계 지도, 아버지 친구가 일본에서 가져온 지도였다. 거기에 유난히 크게 표시된 도시들을 다 가보고 싶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것이 일본의 한 해운회사의 항로도라는 것을. 거기에 크게 표시된 도시들은 주로 해외 지점망이었다. 다시 보아도 그중 가본 도시는 일본과 유럽의 몇 개 도시뿐. 세계 정복의 꿈은 어느 순간엔가 멈췄다. 천정에 붙인 별과 달, 야광 스티커도 그대로였다. 침대애 누우면 맑게 빛나곤 했었지. 추가된 것도 있었다. 간단한 취사가 가능할 것 같은 조리대와 냉장고. 오디오 거기에 에어컨까지 신형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누가 여기 사나요. 미리 난방을 하게."
"아! 옛날 사람. 앱으로 다 되는 거 몰라요. 여기 와이파이도 잡혀요. 공짜"
또 싱긋 웃는다. 그만 웃으라고 하고 싶었다. 정들까 두려웠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다시 질문하고 싶었다.
"자 그럼 일단 라면 먹고 긴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작은 냄비와 포트 양쪽에 물을 올리며 말했다. 백팩을 풀고 성원이 좋아하는 순한맛 라면과 커피를 꺼냈다.
"커피 내리는 동안, 담배나 하나 피고 있어요!"
하면서 재떨이라고 내놓은 작은 종지 하나. 성원이 대학 시절 암스테르담에서 산 델프트 도자기였다.
S.W.Min. 이니셜이 선명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들를때면 아빠 몰래 재털이로 쓰곤 했는데.
"이걸 여기다 두고 갔구나.... 가끔 생각나는데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급하게 떠난 것 같아서 다시 돌아올 줄 알았죠. 3년 전 여기 와서 돌아올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죠.그래서
그냥 그대로 두고 있었죠. 언젠가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실 민대리를 사무실에서 매일 보면서 농장에 가고 싶은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그 질문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릴 수 있다 싶어서"
"아.!!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가 너무 빨리 모든 것을 정리해 버려서 저도 엄마 눈치만 봤죠."
그랬었다. 강 현옥 여사는 그랬다. 장례식이 끝나고 성원이 서울에 가서 회사와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오는 것보다 엄마가 이곳을 정리하고 커피하우스로 이사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전 도시가 나서 엄마를 도왔다. 아빠의 마지막 유산은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골드의 김 기도 사장의 도움이 가장 컸다. 높은 시세로 농장을 매입해 주고 포구의 카페 건물도 직접 나서서 알선했다. 성원의 취업까지 황급히 이루어졌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로 출근했다. 일사불란한 일처리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엄마도 죽었을지 모른다 했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난 3년간 가끔 이곳이 생각났다. 인부들의 숙소라고는 하지만 농장에서 조금 떨어져 산속으로 들어와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아빠 혼자 일하던 농장이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일하는 사람이 늘고 그들의 숙소를 만들었다. 아빠는 그들이 가족과 함께 살수 있도록 따로 집을 지었다. 농장 냄새에서 벗어난 산기슭에 집을 짓고 아늑한 휴식을 보장했다. 작은 서재도 하나 만들었는데 성원이 먼저 차지해 버렸다. 학교에 다녀오면 자전거를 타고 거기 가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친구들을 불러 밤새 수다를 떨기도 했다. 든든한 농장 삼촌들이 지켜주고 있어 여학생들에겐 안전하고 편안한 아지트였다.
"농장은 회사에서 매입했지만 이 집은 필지가 분리되어 있어 그냥 내 개인 명의로 매입했데요. 김 사장님
생각에도 여긴 쓸모없는 땅인 거였죠."
"아!~~"
"난 미국에 있어 몰랐어요. 나에게 산과 집이 생겼다는 것을."
"역시 스케일이 다르시군요. 부사장님 재산이 너무 많아서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우연히 재산세 고지서를 보니 내가 집주인이기에 주소만 보고 한 번 와봤죠. 그리고 알았지요.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여기에 왔었다는 익숙한 냄새와 구조 모두 기억났어요"
"그렇겠죠. 그렇게 토하고 뒹굴고 더럽혀 놓고 갔으니. 기억못하면 이상한 거죠."
"반성하는 마음으로 가끔씩 와서 집주인의 도리를 하고 있습니다. 풀도 뽑고. 가구에 먼지고 털면서."
그가 말하는 것보단 자주 와서 공들여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방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성원의 아지트 만큼은 항상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생기가 흘렀다. 성원은 방 안의 작은 사물까지 하나하나 챙겨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인아도 있고, 성원의 대학 시절도 있었다. 창 밖의 풍경조차도 세월을 넘어 수능이 얼마 안 남은 그 가을의 바람이 불었다.
"여기 와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어요."
충동적으로 말했다. 자난 2주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하루 쉬겠다고 말했을 때, 김 부장은 푹 쉬고 오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기만 하고 꼭 돌아오라고 했다. 도망갈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도망치고 싶긴했다. 새로 만난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난 2주처럼 일하느니 도망쳐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지도를 보니, 아직도 제가 가야 할 곳이 많아요. 그런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김세안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조용히 라면 한 그릇을 성원 쪽으로 밀었다. 라면을 먹는데 뜨거웠다.
뜨거운 김 사이로 눈에서 무엇인가 흘러 내렸다. 순한 맛이라고 했는데 지나친 난방으로 성원은 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