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자 May 23. 2018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을 읽고.

- 인간을 사랑한 자, 요조.


우리는 무언가를 실격할 수 있다. 욕심을 내거나 욕심을 내지 않으면 잃게 된다. 어찌하든 잃게 된 건, 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자격도 ‘실격’할 수 있을까. 우선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세워놓지 않고서는 실격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다.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은 그러한 논의를 거치는 소설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자격을 잃는다는 건 무엇인가. 결코 인간답지 않은 인물, 요조를 통해 인간의 면면을 살펴본다.

주인공 요조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우스운’ 행동으로 모두를 속이려 든다. 간혹 요조의 속임수를 간파한 사람이 몇 등장하긴 하지만, 요조는 뛰어난 위선자인 건 맞다.


틀림없이 편파적인 부분이 있는 건 뻔한데, 결국 인간에게 호소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내겐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둔 채 다시 우스운 행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중)


요조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인간의 여러 모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요조는 가정부들에게 강간을 당한 사실도 있다.) 인간은 사소하게나마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며, 볼품없는 매력을 어필해 이성애(愛)를 취하려 한다. 그것을 세련된 척 가장하기도 한다. 요조는 그런 인간 면면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요조의 우스운행동 몇 번이면 피하거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보다 요조가 가장 두려워한 건, 대부분의 인간들이 따르는 ‘합법’이다. 상식적인 규칙과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이 전부인냥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에 벗어나는 존재에겐 한없이 박해지는 인간들의 뻔뻔함을 경계한다. 요조는 뻔뻔한 긍정보단 진실된 비극을 끌어안는다. 그러한 대목이다.


비합법. 내겐 그것이 은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범죄 의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인간 세상 속에 살면서 평생을 범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내 고행의 반려자이고, 그 녀석과 둘이서만 소박하고 즐겁게 놀아나는 것도 내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후략) (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중)


이런 방식은 은희경 작가의 작품 <새의 선물> 속 주인공의 방식과도 겹친다. 자기 자신을 두 가지로 분리한다. 대외적인 방식(합법)으로 사용할 자아와 진정한 자신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비합법) 자아로 줄기를 나눈다. 주인공 진희의 심리묘사 대목이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중략)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은희경 – 새의선물 중)


합법을 경계해 비합법을 사랑하는 사람. 상식적인 것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다수의 규칙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사람. 요조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만 안심하는 인물이다. 요조는 그런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우스운행동을 사용한다. ‘바라보는 나’는 비합법의 세계에 살면서, ‘보여지는 나’는 합법의 세계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요조는 다수 인간에비해 어딘가 특별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인간이 합법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두가 요조처럼 어렵고 두려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요조가 가진 특이성 즉, 다른 인간에비해 독특한 고독의 무게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요조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불안함을 말하고 있다. 요조는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요조는 인간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보인다. 인간을 마음 놓고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만큼 생각과 방식도 제각각이라는 사실은, 요조에겐 타인을 밀어내야 하는 명분이 됐다. 그 후, 가면을 쓰고, 거리두기를 적절히 함으로써 나름대로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았다. 그것을 요조 자신은 ‘실격’이라 칭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약하디 약한 자아를 실격이란 말로 조심스레 드러냈다. 지극히 인간다운,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 그렇다면 요조는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 자처해서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이 아닐까. 스스로 인간 자격을 상실한, 실패자의 위치를 선택한 것 아닐까.

인간에게는 저마다 실격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다수와 다른 것, 보통의 것에 어긋나는 것. 인간 자격을 실격할 수 있는 요인이 될 법하다. 하지만 인간의 정의가 집단을 기준으로 규정된 곳에서 그것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올바른 것은 없다. 다수의 기준을 따른다 해서 그것이 자격이 되고, 따르지 않는다 해서 자격 상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인간적 기준이랄 것도 무색해진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 있다. ‘인간 실격’은 누구에게 붙어야 하는 꼬리표인가.

작가의 이전글 벚꽃이 지니 해가 비춥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